월요일, 12월 23, 2013

트리엔트 공의회

종교개혁 이후 교회 지도부가 추진하던 쇄신 노력은 우여곡절을 거쳐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입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후기에는 가톨릭교회는 수많은 성인을 배출하게 되는데 1520년부터 1620년까지 1세기 동안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시성된 성인만 36명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성인들의 시대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교황 바오로 3세(재위 1534∼1549)가 1545년 12월3일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지방의 트리엔트에서 소집했다고 해서 트리엔트 공의회로 불리는 이 공의회는 1563년 12월4일 폐막될 때까지 무려 18년의 기간이 걸렸고 약 10년간 중단되기도 했지만 교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공의회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공의회에서 가톨릭 신앙과 규율의 핵심 문제들이 재정비되었고 이를 통해 교회가 속화된 모습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트리엔트공의회는 성경만을 하느님 계시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루터의 주장에 맞서 성경과 함께 성전(聖傳·거룩한 전통)도 같은 계시의 원천으로 똑같이 존중돼야 함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 오로지 믿음만으로 구원된다는 루터의 주장에 대해 믿음 이 구원의 시작이요 기초이지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과 함께 선행이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하느님의 은총만을 강조하여 교회의 성사를 부인한 루터에 맞서 교회의 7성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원을 두고 있음을 명확히 했습니다.
공의회는 특히 성체성사와 관련 미사의 성변화 때에 빵과 포도주가 모양은 그대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제로 변화된다는 실체 변화 교리를 채택하고 고해성사에서의 비밀고백과 보속 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확실히 하였습니다. 또 주일과 대축일 미사에 강론을 의무화하고 소속 본당 신부와 2명의 증인 앞에서 맺어지지 않는 모든 혼인은 무효임을 결정하였습니다.
이밖에 연옥, 대사, 성인과 유해 공경, 성화상 공경 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도 체계화하였습니다.
학자들은 트리엔트 공의회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한 교회의 최고의 응답이라고 평가합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에 대해 맞대응 했다는 의미가 아닌, 교회의 내적 각성을 통한 쇄신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들은 지난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교회 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영향을 주었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도 교회와 신자들의 삶 곳곳에 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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