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12월 27, 2013

2013년 성탄절 미사

                                    올해 성탄미사는 12/25일 오후2시에 본당에서
                                    거행되었습니다.
                                          Bourke 신부님께서 한국말로 유창하게
                                              180여명의 신자들과 함께
                                         아기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거룩한 미사를 거행하였습니다.


 















12/29 주보 공지사항

* 새로 오신 교우 가족을 환영 합니다.
      서정철, 서경희 미카엘라  가족, 양영애 세실리아가족,
      강희경&강석우 가족, Richard Kim&Sue Kim 가족
  
* 연령별 (30-40대, 50-60대 이상) 모임 및 취미활동반 모집
    - 스포츠댄스, 전통무용, 사물놀이, 기타연주,
      테니스,등산, 골프, 생활영어(미국인)
    - 안내데스크에서  접수중
    - 신청자수에 따라 class가 개설될 예정임. (복수 신청도 가능)
 
* 2014년 성경공부반 접수
   - 창세기(남,여) 탈출기, 마르코, 요한
   - 2014년 2월중 개강 예정
  
* 가톨릭 성서모임 연수
  - 창세기, 탈출기, 마르코 ( 두개과정까지 수강가능)
  - 장소: 성김대건 안드레아 본당
  - 일정: 1/9(목) - 12(일)
  - 연수비: 1과목( $80), 2과목 ($130)
  - 각 과목별 봉사자에게 신청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2014년 성당 카렌다 배부 중 입니다.
 
* 소피 본당 기금마련 AUCTION 행사 안내
    - Auction : 2014. 3. 29(토)  , 저녁만찬, 댄싱,옥션,
   - 신청자가 많아 조기 마감될 수 있으니 일찍 등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접수: Carolyn Kennedy (auction@stmadsophie.org)
 
* 견진성사 신청서 접수: 11/10 부터, 안내데스크
   - 견진교육: 2014년 2월중
   - 견진피정: 2014년 4월말
   - 견진성사: 2014년 5월8일(목) 7PM (피터 사튼 주교님 집전)

 * 송년 파티 : 12/29 일요일 미사후
   - 장소: 친교실 
   
* 예비자 및 기존신자 교리교육 안내
   매주 수요일 저녁 7시에 교리강좌가 있습니다.
   가톨릭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 및 재교육을 원하시는 모든 신자들의
   참여를 환영합니다
   - 장소 : 본당 도서관
   - 강사: 박 부루노 부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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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School 학생 모집
   - 강의: 매주 일요일 3:45pm - 4:45pm
  - 교사진: 교구청 교사연수를 수료한 경험 풍부한 교사가 지도함
  - Class: 
     (1) prekin,유치부 ~ Kids Church ~ Room AB
     (2) 1st  Communion (2~3학년) ~ Room J
     (3) 4-5 학년 ~ Room I
     (4) 6-12학년 ~ Youth group 은 매월 첫주 일요일 4pm-6:30pm
                              소피본당 youth group과 함께 활동합니다. (2014. 1월부터)
  - 미사후 안내데스크에서 신청서 교부중.
  - 전화: (206) 579-7800  / email : koreaninfo@stmadsophie.org
* 보조교사를 신청받고 있습니다 : 성인및 16세 이상 고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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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여하실 분들을 환영 합니다.
   - 전례,성모회 등 공동체에 봉사하실 분
   - 성가를 같이 부르실 분
   - 레지오를 같이 하실 분
   - 성경공부 같이 하실 분
   - 기도를 같이 하실 분
   - 관심있으신 분은 koreaninfo@stmadsopie.org 나 (425) 830-1515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 St. Madeleine Sophoe Catholic School : 성 매들린 소피 가톨릭스쿨 학생모집
   - 수시모집
   - 학년: PK ~ 8학년 (www.smsbellevue.org) (425) 747-6770 (ext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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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공동체 블로그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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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12월 23, 2013

가톨릭 교리서 "생명의 길" (가톨릭교리통신교육회 발간)


 입문
1.  추구하는 인간
2.  인간의 갈망
3.  종교란 무엇인가?
4.  그리스도교
 제 1편
1장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
2장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제 2편
3장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4장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다
5장  인간의 타락과 하느님의 성실
 제 3편
6장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심
7장  예수님의 공생활
8장  예수님의 수난과 돌아가심
9장  예수님의 부활
 제 4편
10장  성령(聖靈)
11장  삼위일체(三位一體)
12장  가톨릭교회
 제 5편
13장  그리스도의 사목활동
14장  세계교회사
15장  한국천주교회사
 제 6편
16장  하느님의 어머니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17장  교회의 어머니요 모범이신 마리아
18장  갈라진 신앙세계
19장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신다
 제 7편
20장  인간 생활과 하느님의 계획
21장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생활
22장  가치있는 생활(5.6.8.9 계명)
 제 8편
23장  의로운 사회 건설(4.7.10 계명)
24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
25장  은총과 신성에의 참여
 제 9편
26장  그리스도와 기도생활
27장  개인기도와 전례기도
28장  파스카 신비와 성사생활
29장  세례성사
 제 10편
30장  견진성사
31장  성체성사
 제 11편
32장  성품성사
33장  고해성사
 제 12편
34장  혼인성사
35장  병자성사
36장  그리스도인의 죽음
37장  하느님 나라가 오심





* 입문
1.  추구하는 인간
인간은 출생에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이 질문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알게 된다. 질문을 하는 것은 인간만이 지닌 특권이며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지어 주는 요소이다.
어린이는 말을 시작하면서부터 하루에도 수십 번 "이건 뭐야?" "저건 뭐야?" 하는 질문으로 어른들을 귀찮게 하면서 주변의 사물을 배우고 성장해 가면서 사건의 의미와 내용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사춘기의 청소년들은 또 다른 의식의 눈을 뜨면서 자신과 세상에 대한 보다 내면적인 질문을 제기하며, 이 질문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계속된다. 다만,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될 뿐이다.
 인간의 지혜는 자신들이 던진 이 질문들로 해답을 얻어왔고 그 결과 오늘날 인간 생활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과학의 발달이란 바로 인간의 상상력, 인간이 던진 질문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불과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계수나무 아래서 옥토끼가 떡방아를 찧는 아름다운 곳으로 상상만 하던 달나라에도 인간은 다녀왔고, 통신수단의 발달로 안방에 앉아서도 지구 저편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 지진 참사의 소식을 재빨리 알 수도 있으며,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건물이나 기계 따위는 고스란히 남겨 놓은 채 사람은 물론이고 모든 생명체만 순식간에 없애 버린다는 중성자탄도 만들어 내었다. 뿐만 아니라 의학의 발달은 인공심장을 만들어 이식하는가 하면, 시험관 아기까지 탄생시켰으며, 갖가지 전염병을 퇴치시켰고, 인간의 생명까지도 연장시켜 주었다. 또한 인간의 뛰어난 지혜는 인간이 걸어 온 발자취, 지구상의 인류의 기원까지 추적해 내었고 미래의 발전까지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엄청난 변화요 발달이긴 하지만 생명의 근원, 죽음의 본질, 죽음 후의 일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명해 주지 못한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우리가 매일 먹는 한 톨의 쌀을 만들 수 없으며 죽음 자체를 면제시켜 주지도 못하며, 인간을 죽음의 불안과 절망으로부터 구원하지도 못한다. 인간 실존, 인생의 의미에 대한 해답은 수학적으로 풀이되거나 과학적인 관찰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이나 기계문명, 의학의 발달은 인간 생활을 한없이 편리하고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이 만든 이러한 발전이 도리어 인간성과 생명을 위협하고 파괴하며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다. 자동차의 발달과 함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통사고, 인류의 존폐를 위협하고 있는 핵무기의 위력, 수많은 생명을 한꺼번에 앗아가는 가공할 전쟁무기들, 현대의 거대한 메커니즘 속에 생산의 수단과 노예로 전락한 인간 존엄성, 산업발달과 함께 야기되는 각종 공해와 그로 인한 부작용 등 인간은 새로운 자가당착에 빠지면서 우리의 일상은 또 다른 불안과 두려움에 싸이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발달의 의미와 보람과 그 향방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무엇이며,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남녀노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던지는 이 질문의 표현은 여러 가지이나 근본은 매양 하나의 질문이며 인간은 끊임없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다.

2.  인간의 갈망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인간의 이성은 세 가지 기능 즉 지능, 의지, 정서를 가지고 있다. 지능은 진리(眞理)를 찾고, 의지는 선(善)을 위해 주어졌고, 정서는 아름다움(美)을 찾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인간은 바로 진·선·미를 위해 존재하며, 이를 갈망한다. 이 진·선·미는 어떤 물질적인, 감각적인 차원이 아니다. 이것은 보다 초월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편안히 쉴 수 있는 집과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옷을 필요로 하고 이를 위해 돈이 필요하지만 이것만이 인간이 찾는 절대가치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삶의 의미를 깨닫고, 비록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손해가 있더라도 악을 피하고 선을 찾으며, 주어진 아름다운 정서를 찾는 것이 인간이다. 비록 인간의 신체구조는 물질세계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나 인간의 육체는 단순한 물질 이상의 존재이다.
 동물은 자연적인 본능이나 육체적인 구조에 의해 본능적으로 움직이지만 인간은 매순간 자신의 자유스러운 선택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은 자기 존재 의미를 물을 수 있고 모든 사물을 의식적으로 관찰하고 숙고할 수 있는 명석한 정신과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 의식의 변형될 수 없는 신비이며, 이 의식이 있기에 또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인생이란 바로 이런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은 보다 높은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이 의미를 찾는 과정이 곧 인생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가 삶의 의미를 깨달아 자신을 성숙시켜 나가야 하는 유일한 이성적 동물이다. 호도나무는 자연법칙에 따라 호도라는 열매를 맺으며, 고양이는 본능이라는 법칙에 따라 쥐를 잡는다. 그것들은 더도 덜도 될 수 없는 고정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진·선·미를 위해서 살 수도 있고, 스스로를 자포자기하면서 불행한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이 되었다는 그 자체로서 위대한 것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귀하며 그 고귀한 가치를 어떻게 찾아야 하느냐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의 생활태도와 방법은 가지각색이나 그 다양함 속에서 한 가지 공통점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의지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모두가 구하는 행복인데도 우리 주위에는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많은 듯하다.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다. 누구나 처음 목표했던 재물(지위, 명예 …)을 얻게 되면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더 큰 욕망을 품게 된다. 행복이란 우리가 그리워하며 바라고 있는 것을 얻었던가, 그것이 채워졌을 때 우리 마음 속에 찾아드는 느낌이다. 인간은 원하던 것을 얻었으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아서 더욱 욕심을 내게 된다. 우리 주위에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많은 듯이 보임은 바로 이 끝없는 욕심 때문이 아닌가! 그들은 행복을 위한 자신의 목표가 잘못 설정되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절대적 안정을, 영속하는 사랑을, 끝없는 행복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어느 한 순간일 뿐 결코 이 갈망은 온전히 충족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은 충족시키지 못하는 갈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어째서 일정한 공간과 시간에 태어나 특정한 문화와 역사 속에 살다가 죽어야 하는, 유한 속에 사는 인간 존재가 무한한 갈망을 갖고 있는가? 이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인간이 지닌 갈망 중에서 특히 가장 큰 것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러기에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기 위해 그렇게도 애를 썼고,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몸에 좋다면 먹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고 아무도 이를 피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유한한 존재임을 알면서도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며, 아무도 임종의 불안과 죽음에의 공포 속에서 인간을 구해 주지 못한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차피 모든 것이 죽어 없어질 것이라면 애당초 왜 이런 것들을 얻으려고 발버둥쳤을까?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온 세기를 두고 던졌던 질문이다.

3.  종교란 무엇인가?
인간은 아득한 옛날부터 인생과 우주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해답을 추구해 왔다. 또한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갈망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것이다. 현대의 고도로 발달한 인류학의 연구에 의하면 원시인들에게도 인생의 궁극목적에 대한 탐구의 흔적이 나타나 있다고 한다. 원시인들도 그들 나름대로 인생에 대한 물음을 어떤 초월적 힘에 대한 외경(畏敬)에서 찾았으며, 마침내는 죽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인간은 그 허무함과 무상을 극복하기 위해 영생 혹은 후세의 삶을 믿고 있었음이 그들의 장례예식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들이 살았던 동굴에 묻힌 사람의 뼈가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은, 죽은 후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믿고 죽은 이를 위해 정성 들여 장례식을 거행한 증거이다. 또한 인간의 유해는 동물의 시체와는 달리 정성 들여 매장했으며 죽음의 여행길에 필요한 도구나 음식 혹은 동반자까지 함께 묻은 흔적도 그 증거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던 동굴과 뼈가 묻혀 있는 무덤들에서 발견되는 조각과 그 밖의 예술작품들은 모두 그들의 종교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인간은 시초부터 종교를 가지고 살았으며 현재에도 문명인이든, 미개인이든 모두 종교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와 문화, 인간의 지성과 종교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 종교는 없어질 것이라고 하는데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왜 종교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가?
종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존재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현재 세상에는 서로 다른 종교들이 많이 있지만 모두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비슷한 데가 있다.
  
첫째, 
모든 종교는 인생과 우주의 궁극적인 질문을 해결하려 하며, 각각의 종교가 제시하는 해답은 다를지라도 그 질문만은 같다.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선과 악은 무엇이며, 인간에게는 왜 희로애락이 엇갈려 있는가? 그 원인들은 무엇인가? 인간의 참된 행복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 그리고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간과 우주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신은 하나라는 유일신교를 믿는 민족과 여럿이라는 다신교를 믿는 민족이 있으며, 인격적인 신과 비인격적인 신을 믿는 종교, 또는 자연종교와 계시종교 등등 다양한 종교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서도 어떤 종교는 인간의 지상적인 일에만 초점을 두고 있으며 또 어떤 종교는 인간의 일생은 현세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도 계속 생명이 있는 것으로 믿기도 한다. 어쨌든 수많은 종교가 있고 또 각자 자기 종교가 옳다고 믿고 있다. 때문에 어떤 것이 옳고, 옳지 않은지 식별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은 진정한 종교를 찾기 위한 문제점이다.
둘째,
종교는 인생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인간에게 확신을 가져다준다. 종교는 인생문제에 과학적인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하나 인간의 삶에 무한한 의미를 부여한다. 어떠한 경우든 인생의 신비에 대한 해답들은 과학적인 탐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동일 뿐이다. 만약 우리들이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그런 종류의 증명을 추구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종교가 주는 해답에 실망할 것이다. 종교는 과학적 이해 이상의 차원이다.
 과학은 우주의 물질적, 화학적, 생물학적 문제를 다룸으로써 인간의 실생활을 향상시키고 있다. 그러나 과학으로는 인간의 자유나 인간의 존재 이유, 생명과 죽음 자체에 대한 신비를 해결할 수는 없다. 모든 사물의 존재의 신비는 믿음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지 인간은 인간 이상의 초월적인 어떤 절대자와 대면하고 있음을 믿으며 바로 이 믿음 안에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으나, 굳이 종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인간과 절대자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종교가 절대자와 나와의 삶의 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는, 종교의 대상인 절대자 곧 종교의 교의(敎義)이며, 둘째는, 종교행위를 하는 인간, 따라서 인간이 지켜야 하는 종교윤리이며, 셋째는, 절대자와의 관계를 구체화하는 종교행위 즉 종교의식(宗敎儀式)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믿음의 내용(신앙개조: 信仰個條)인 교의이며, 여기에서 종교윤리, 종교의식이 나온다. 각 종교는 이 교의에서 인생과 우주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나름대로의 해답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종교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우선 그 종교가 믿는 교리, 그 종교가 가르치고 있는 종교윤리(그리스도교의 계명), 그리고 그 종교의 의식(기도와 전례) 모두를 알아야 한다.
언제부터 종교현상에 '종교'라는 단어를 쓰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그 단어의 의미를 분석해 보면 우리에게 종교가 어떤 것인가를 더 의미 있게 알려준다. '종교'는 '宗'자와 '敎'자의 합성어이다. 宗자는 으뜸, 기둥, 근본 등이며, 敎자는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교육의 으뜸이라는 것이다.


4.  그리스도교
인간생활은 근본적으로 종교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일찍부터 삶의 신비를 느껴 온 인간은 만물의 근원을 탐구하여 인생에 얽힌 갖가지 의문에 대해서 종교에서 그 해답을 찾았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 역시 이러한 문제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조상들도 옛날부터 우주와 삼라만상에 대한 경탄과 두려움에서 막연하게나마 절대자를 섬겨 왔다. 모든 물체에 정령(精靈)이 있다고 믿고(샤머니즘), 큰 나무나 바위에 정성을 바치고 무당을 불러다 굿을 했다. 그러나 이 샤머니즘이 제시하는 인생문제에 대한 해답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좀더 다른, 인간이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인생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을 끊임없이 찾았다. 그래서 중국대륙을 거쳐 들어온 불교를 통해서, 도교를 통해서, 유교를 통해서 인생문제의 해결을 계속 추구했던 것이다.
조선후기(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정계(政界)에서 은퇴해 있던 실학파의 남인 학자들은 이러한 여러 가지 인생문제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모임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에 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이 쓴 서학에 관한 한문서적을 알게 되었고, 함께 모여 연구하고 그 내용을 토론했다. 이리하여 학문으로 시작한 서학 연구가 마침내 신앙으로 발전하였고 그것은 이 땅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일찍부터 현자들은 인간의 행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찾아야 함을 깨달았다. 그 진리는 영원한 것이며, 유한한 세상과 인간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무한하신 절대자, 영원불변의 절대자만이 인간의 무한한 갈망을 채워주실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분을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분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우리는 배워 믿게 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우주의 신비와 인생에 관한 문제를 '창조주이시며 한 분이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대답해 주시고 가르쳐 주신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민족의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이 세상과 당신 자신을 더 분명히 가르쳐 주시려고 외아들을 보내셨는데 이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라 한다. 하느님은 이 외아들을 통해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참 삶,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믿음으로써 인간은 불안과 고통과 죽음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평등과 자유 사상을 바탕으로 한 내세(來世)의 하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인류에게 가장 진정한 기쁜 소식이 되었던 것이다.
불교나 유교는 인간 이성으로 진리를 깨우치고 그로써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므로 자연종교라고 한다.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터득하고 깨달아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특이하게도 하느님이 손수 길을 가르쳐 주시고 인간을 불안과 공포, 고통과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종교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스스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만 인간이 그 해결책을 알 수 있기에 그리스도교를 계시(啓示)종교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하여 이 '가톨릭교리통신교육회'의 문을 두드렸다.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의 구체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제 1편
1장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

<요점정리> 

▨ 하느님은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시는가?
하느님은 대자연과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 하느님은 누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는가?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다(성서와 성전).


1. 계시
하느님은 신비 속에 살아 계신다. 하느님은 단순히 우리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분이기에 우리 힘으로 하느님을 알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느님이 먼저 인간들에게 당신의 신비를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을 계시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빛으로 하느님을 믿는다.
신앙은 자신을 알려 주시는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이다. 신앙은 과학이 입증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행위이다. 두 사람을 사랑으로 맺어 주는 것이 인격적인 신뢰이듯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도 이처럼 깊은 신뢰 속에서 인격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이렇듯 신앙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에서 이룩되는 진리이다. 이것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안다. 이 사랑을 체험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신앙의 진리는 체험하는 우리 자신을 사로잡는 진리이다. 모든 신앙은 하느님께 그 바탕을 두고 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장기간에 걸친 철학적 논증의 최종 결론이 아니다. 믿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은총으로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가 당신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기는 하시지만 우리가 당신을 믿도록 강요하지는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또 그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시기 때문이다.
단순한 지식만으로 하느님께 나아갈 수는 없다. 하느님은 신비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에 은총을 주시고, 말씀을 듣는 사람이 신앙에 응답하도록 일깨우는 동시에, 기도와 신앙에 대한 불타는 열망을 갖게 하시고, 하느님께 마음을 열도록 움직이시면서 말씀하실 때 가능한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시며, 천지 만물을 왜 만드셨으며, 사람은 무엇이고,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당신이 스스로 말씀하심으로써 인간은 모든 존재의 신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계획을 계시하시기 전에 합당하게 준비하도록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계시를 드러내셨고 많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 계획을 미리 알려 주셨다. 그런데 예언자들을 통한 당신의 말씀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어 구세주에 대한 예언의 말씀과 준비로 이루어졌음을 성서는 일러주고 있다.
구약의 약속과 예언대로 구세주가 오심으로써 새로운 약속의 시대가 열렸는데 이때를 신약시대라 한다. 이때는 하느님이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을 계시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완성자이시다. 그리고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한 사도들을 통해서, 오늘날에는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진리를 계시하신다. 

2. 성서
하느님의 말씀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성서와 성전이 목적하는 바는 인간의 구원이다. 성서는 성령의 감도에 따라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으로서 구약과 신약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구약성서는 46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역사서(21권) 교훈서(7권) 예언서(18권)로 나눈다. 구약성서는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 구원의 시대 이전에 살던 인류 상황에 맞추어서 하느님과 말씀에 관한 지식, 말씀에 대한 하느님의 공의 하시고 자비하신 태도를 모든 이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기록한 책이다. 성서는 처음에는 희미하게 계시를 암시하고 있으나 예언자들을 통하여 구세주의 구원역사 안에서 점점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구약의 예언과 약속대로 하느님께서는 신약에 와서 당신의 계시를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내시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계시 자체인데, 이분에 대해서 기록한 책을 신약성서라고 한다. 신약성서는 모두 27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마태오·마르코·루가)와 요한복음서, 사도 바오로의 편지(14권), 가톨릭 서간(7권), 사도행전(1권), 묵시록(1권)으로 세분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경전으로 받들고 있는 성서는 하느님이 보낸 메시지로서 다른 어떤 작품과도 비교될 수 없다. 따라서 성서는 교회의 모든 가르침의 원천이 될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의 규범이 된다. 

구약성서 46권 : 
● 역사서 : 21권
모세오경 다섯 권(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 판관기 / 룻기 / 사무엘서 상·하 / 열왕기 상·하 /
역대기 상·하 / 에즈라 / 느헤미야 / 토비트(제 2경전) / 유딧(제 2경전) /
에스델(일부 제 2경전) / 마카베오 상·하(제 2경전)

● 시서, 지혜서 : 7권
욥기 / 시편 / 잠언 / 전도서 / 아가 / 지혜서(제 2경전) / 집회서(제 2경전)

● 예언서 : 18권
이사야 / 예레미야 / 애가 / 바룩(제 2경전) / 에제키엘 /
다니엘(일부 제 2경전) / 호세아 / 요엘 / 아모스 / 오바디야 / 요나 /
미가 / 나훔 / 하바꾹 / 스바니야 / 하깨 / 즈가리야 / 말라기 

신약성서 27권 :
● 복음서 : 4권
     
마태오 복음서 / 마르코 복음서 / 루가 복음서 / 요한 복음서
● 사도행전 : 1권  
● 편지 : 21권
     
바울로의 편지 열네 편 / 야고보의 편지 / 베드로의 편지 두 편 / 요한의 편지 세 편 /
     유다의 편지
 ● 요한묵시록 : 1권 


3. 제2경전이란?(9권)
위의 구약성서 가운데 토비트, 유딧, 에스델서의 일부, 지혜서, 집회서, 바룩, 다니엘서의 일부, 마카베오서 두 권을 제 2경전이라 부른다. 유대인들은 기원 후 90년 경 팔레스티나의 얌니아(Jamnia)라는 곳에서 유대교의 경전 목록을 확정하였는데, 여기에 제 2경전에 해당되는 성서들이 빠져 있으나 382년 로마의 주교회의에서는 제 2경전에 해당하는 성서를 포함하는 그리스도교의 경전 목록을 확정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은 이같은 그리스도교의 경전 목록을 버리고 유대교의 경전목록을 취함으로써 제 2경전에 해당되는 성서들을 성서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1968년 세계성서공회와 로마 교회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에는 제 2경전을 수록하도록 합의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가톨릭용(제 2경전 수록), 개신교용(제 2경전 삭제)으로 분리하고 있다. 

4. 성전(聖傳)
교회는 성서와 똑같이 성전(聖傳)을 기록되지 않고 교회에 전해지는 거룩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성전은 성서의 바탕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계시를 역사 안에서 조상들의 입을 통하여 충실히 보존하면서 후손에게 전달했다. 신약시대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말씀으로 복음을 선포했다. 그런데 시대가 흐르면서 후세에 전할 필요성에 따라 글로 쓰게 되었는데 이것이 성서이고 하느님의 계시와 가르침이 글로 씌어지기 이전에 말로써 전승되어 내려온 것을 성전이라고 한다. 사실 하느님의 계시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낱낱이 기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성전은 성서가 말하고 있지 않은 것까지도 우리에게 계시로서 교회를 통해 교훈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2장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요점정리> 
▨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한없이 완전한 분이시고, 하늘과 땅, 모든 인간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또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오직 한 분이시고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인격과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보통 다음과 같이 하느님께 대한 인상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 전지 전능하신 분, 불의를 꺾으시고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시는 분, 자비로우신 분, 벌을 내리시는 분, 어디에나 계시는 분, 원수를 갚아 주시는 분, 사랑 자체이신 분, 만물의 창조주이신 분.. 
지난 세월 많은 이들은 하느님의 엄한 면, 전지전능한 면, 심판자로서의 면모를 강조하였고 이로써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하느님의 심판에 더 관심을 기울이면서 하느님을 대하기 두려운 분으로 알아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서를 펼치면 우리가 생각했던 그러한 면모들 대신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크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가난한 이들, 창녀들, 죄인들과 어울리시면서,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나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다.
특히 하느님에 대한 주요한 계시는 루가 복음에 나오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루가 11,15-32)에 나온다. 여기서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 우리의 죄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고자 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이 계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거기에 하느님이 계시며,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 안에 현존하심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하는 그러한 감정만을 뜻하지 않고, 고통받고 억눌리며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애쓰는 마음 모두를 뜻한다. 이렇게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한 분이신 하느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당신 백성을 항상 돌보시는 분이다.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느님은 역사의 사건들과 말씀을 통해서 당신 자신과 당신의 구원계획을 알게 하셨다(계시헌장 2).
하느님은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와 생명의 원천이시다. 하느님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못한다.
하느님은 인격적인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강력한 의지와 위대한 자비로 이스라엘을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생활의 계명을 주셨으며 그들의 원수를 쳐 이기시고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모든 것을 유지하시고 지배하신다.
하느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사물을 다 알고 계시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슬픔을 알고 계시고 또 그들을 구원하는 방법을 미리 알고 계시다(출애 3,19-22).
하느님은 무한히 성실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하느님께 죄를 범할지라도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하느님은 본질상 변함이 없는 분이시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가지만, 하느님은 영원히 계신다. 그 영원에서 볼 때 모든 시간은 언제나 현재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돌보신다. 하느님의 영원성은 충만한 생명과 완전한 사랑에서 오는 영원성이다.
하느님은 우리처럼 죽을 육체를 가지신 분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으시는 영적인 분이시다. 하느님은 장소에 제한을 받거나 물질과 떨어질 수 없는 그런 유형체가 아니시다. 하느님은 모든 것에 현존하신다. 하느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특별한 방법으로 현존하신다.
하느님은 만물을 초월하는 분이시다. 만물은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물이 있기 전에 하느님은 계셨다. 변함이 없는 영원한 하느님의 실재는 그 자체가 완전한 것으로서 유한한 실재와는 완전히 구별된다.
하느님은 거룩한 분(이사 5,24)으로서 모든 선의 근원이시다. 이 거룩함은 자비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은 죄인들을 낫게 하시고 그들을 당신께로 부르신다(이사 6,5-7).


 제 2편
3장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요점정리>
▨ 하늘과 땅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늘과 땅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아무 재료도 없이 창조하신 것이다.

  
1. 무(無)로부터의 창조
하느님은 당신을 우리의 창조주로 계시하신다. 하느님을 참으로 안다는 것은 그분이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심을 아는 것이다. 하느님은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조물에게 주시는 축복을 통해서 당신의 완전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천사들과 지상 사물들을 창조하신 후에 영(靈)과 육(肉)으로 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이 '무'에서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말은, 만물이 자기의 본질에 따라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는 땅도 없었고 우주도 없었으며 재료도 없었다. 그리고 시간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언제나 계시다. 사물은 하느님으로부터 그 실재를 받았다.
창세기의 서두에서 "한 처음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창세 1,1)고 하는데, '하늘과 땅'은 '모든 것'을 말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에서부터 볼 수 없는 것, 모든 것까지 하느님으로부터 생겨났다는 말이다. 창조란 아무런 재료가 없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전에 무엇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있었다면 오직 무한하신 하느님 한 분뿐이었다. 이 세상 만물이 어떤 꼴을 갖추고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창조에서 비롯된다.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무로부터 창조하신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인간 이성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고 자연과학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
하느님은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여기서 하느님의 말씀이란 단순히 입에서 뱉어지는 말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던 그 무엇이 구체화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창조되는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의지 행위에 의해서 세상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러한 하느님의 의지가 이루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세상을 창조하고 계시다는 말이다. 


2. 창세기의 창조설화
창세기 첫째 장과 둘째 장에서는 세계와 인간의 창조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창세기는 하느님의 자비에 관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창세기 첫 두 장은 과학교과서 식으로 기술된 것은 아니다. 창세기의 관심은 날짜나 물리적 과정이 아니라 신학적 진리이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올바로 이해하면 신앙과 과학간에 갈등이나 대결이 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 확실히 성서는 진화를 가르치지 않는다. 진화란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발전되었음을 말하는 반면, 창조란 하느님이 재료 없이 만드셨으며, 하느님 자신이 모든 것의 기원이 됨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창조론과 진화론은 그 출발부터 다르다.
첫 번째 창조의 이야기를 서술한 저자는(창세 1,1-2,4)창조사업을 '육 일' 간에 걸친 사업으로 묘사했고, 일곱째 날에는 하느님이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쉬셨다"(창세 2,3)라고 기록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주간'에 걸쳐 하느님이 창조사업을 완성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느님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늘 '현재'이시나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 시대의 문화와 세계관과 종교관을 이용하고 있다. 여기서 중심 진리는, 하느님께서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주의 창조주라는 계시는, 인간이 하느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바탕과 또 인간은 모든 피조물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바탕을 제시한다. 하느님은 세계를 창조하셨고, 또 영원한 의미를 갖는 계획에 인간을 참여케 하셨다. 하느님을 창조주로 맞아들이는 인간은 피조물의 존엄성을 인정하게 된다. 


3. 천사  

<요점정리> 
▨ 천사는 무엇인가?

천사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을 섬기고 자기의 맡은 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하느님의 사신(使臣)이다.
성서는 천사들이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순수한 영적 존재가 실재로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천사들은 구약과 신약의 구세사(救世史)에서 가끔 임무를 수행했다. 천사들의 수는 분명히 많지만 그 중 라파엘·가브리엘·미카엘, 세 천사의 이름이 성서에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천사들과 그들의 보살핌에 대해서 말씀하셨고(마태 18,10; 26,53),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들었다"(마태 4,11)고 성서는 말한다.
하느님은 천사들을 통해서 힘있게, 그러나 숨은 방법으로 우리를 돌보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천사들의 축일을 지내고 또 매일 미사성제 때 천사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한다. 



4장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다


<요점정리> 
▨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혼은 무엇인가?영혼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어 사람의 생명과 정신활동의 근원이 되며 죽지 않는 것이다. 
▨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模像)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하느님이 인간에게 지성(知性)과 자유, 의지를 주시는 외에도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하심으로써 하느님을 닮게 만들었음을 뜻한다. 
▨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이며, 이에 따르는 인간의 사명은?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은 당신의 생명과 행복을 이 세상과 인류에게 주시고자 사랑으로써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인간의 사명은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인간끼리 서로 협조하여 이 세상을 잘 다스리고 보존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 
▨ 하느님은 무엇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셨는가?하느님은 피조물에게 주시는 축복을 통해서 당신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지상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다.

창조 이야기는 인간 창조(창세 1,26-28)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인간 창조에 관한 이야기 속에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원초적인 계획이 드러나는데,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1. 하느님의 모상(模像)으로서의 인간
첫째,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겉모습이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본질을 닮았다는 의미이다. 즉 자기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이성적인 능력과 선악을 판단하여 행동할 수 있는 양심,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에 책임지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점에서 진·선·미(眞·善·美) 자체이신 하느님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피조물보다도 그 안에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창조물 중에서도 최고 걸작이며 당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에게, 당신의 창조물과 세상을 '다스리고 보존하는 책임'을 부여하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선악을 알고 무한으로 비약하려고 하는 인간의 마음은 인간 스스로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이미 그렇게 되어졌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 안에는 물질적 실재와 영적 실재가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으나, 그 육체와 영혼이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는 아니다. 육체와 영혼은 살아 있는 인간을 이룬다. 영혼은 육체가 인간의 몸이 되게 하는 살아있는 원리이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가 존재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살아 있는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할 때 각 사람의 영혼을 직접 창조하신다.
사실 영혼은 인간이 죽은 다음 영적 실재로서 계속 존재한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에게로 부르시고 마지막 부활(필립 1,23)이 오기 전에도 당신과 함께 기쁨을 나누게 하신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은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전인간의 구원이다. 인간의 구원은 육체가 부활할 때에만, 그리고 주님의 기쁨을 함께 하고 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에서만 성취될 것이다. 

2. 남자와 여자로 창조됨
둘째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졌다. 하와의 특별한 창조이야기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창조주의 특별한 배려로 창조된 것임을 말한다. 즉 남자와 여자는 본질적으로 유사하다는 진리를 극적으로 담고 있다.
성서는 남자와 여자의 동등성과 상호보완성을 강조한다. 남자와 여자는 인간적 조건의 고독을 덜어 주면서 서로를 완성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통하여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창세기의 관점이다(창세 2,23-24).
인간은 보다 완전해지고 또 자기의 힘과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동료 인간과의 사회적 친교와 협력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개개인은 공동 복지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지만, 그러나 어느 누구의 존엄성도 어떤 사회적 선익 때문에 공격을 당하거나 침해당해서는 안된다. 사회는 인간을 고귀하게 만들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은 사회가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되는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현대세계의 사목헌장 75).
인류의 첫 조상들은 그들을 하느님의 자녀 지위에 참여하게 하는 은총 가운데 창조되었다. 그들은 하느님과 평화로운 친교를 맺을 수 있는 은총과 덕행을 지니고 있었다. 하느님과 친교를 맺고 평화롭게 지내던 인간은 숭고함을 지녔고 동시에 피조물인 자신의 지위를 잘 알고 있었다. 창세기 첫 장에는 인간이 하느님과 가까이 지냈고 또 하느님이 인간을 돌보시었으며, 하느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신 것을 인간이 깨달았다고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이 계심을 알아, 하느님과 갖는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것 이상으로 더 영예로운 것은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이 소유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3. 세상을 다스리는 인간
셋째로, 인간은 세상을 '다스리고' 또 세상을 '보존'하기 위해(창세 1,26-28) 창조되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하느님의 위임을 받아 세상을 다스릴 영광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다. 아름다운 예술과 상상력으로써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더 높여 준다. 노동은 인간이 지닌 사명의 일부이며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기술이 인간에게 주는 봉사와 풍요한 생활은 하느님이 원하신 것이다. 창조적 작업은 인간의 영광이요 또 인간의 작업은 가능한 한 인간적이고 창조적이어야 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란 이름으로 모든 피조물을 지배한다는 것은 마음대로 하라는 것과는 다르다. 흔히 인간은 자신이 자연을 마음대로 다루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자연 이용이라는 이름 아래 자연을 파괴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 파괴와 남용은 "자연을 다스리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어긋난다.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시면서 인간에게 당신 창조물과 세상을 다스리고 보존하는 책임을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이 받은 소명은 이 세상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하도록 일하는 것이요,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소명은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신분을 알고 하느님에게서 받은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다. 



5장  인간의 타락과 하느님의 성실

<요점정리> 
▨ 원죄란 무엇인가?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불순종과 교만으로 하느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따먹은 것을 말하며, 이로써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졌던 우정의 계약이 파기되고, 첫 인간이 누렸던 특별한 은총, 즉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고 죽음의 권세에 예속되게 되었다. 이 원죄는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니 이제 인간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자녀로 남을 수 없게 되었다. 
▨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 슬픔이 원죄의 결과인가?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 인간은 자신들이 행한 행위 때문에 고통, 불행을 당한다. 예를 들어, 인간이 산과 들을 오염시키는 결과로 오염된 물을 마시게 되고 이로써 질병을 얻게도 된다. 여기에 인간의 행동에 대해 인간 스스로 책임져야하는 이유가 있다. 
▨ 인간의 타락(원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는 무엇인가?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온전히 주셨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대해서 엄격하심을 말해 준다. 
▨ 악마(사탄)는 누구인가?하느님이 본래 선하게 창조하였으나 후에 자신들의 의지로 타락한 악한 영들로서,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유혹하고 악한 충동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 원죄 이후 하느님은 인간을 버리셨는가?그렇지 않다. 하느님은 당신 사랑의 계약에 충실하시어 예언자들을 통하여 인간이 당신께 돌아오도록 초대하시고, 마침내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시어 인류를 구원하도록 허락하셨다.


1. 고통·악의 문제
성서는 하느님이 인간의 고통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무한히 선하시고 또 인간에게 끊임없는 축복을 주시고자 하시며, 어떠한 악도 결코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인류의 역사는 고통과 비탄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악의 문제는 신비이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신 하느님은 악이 있기를 원치 않으시나 악이 있는 것을 허용하신다. 그리고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를 남용함으로써 이 세상에 불행이 들어오게 될 때, 하느님은 이 불행도 선한 방향으로 돌리실 것을 약속하신다.
악의 문제는 우리가 생생하게 체험하는 살아 있는 문제다. 악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해명된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신비, 곧 예수의 생애는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의 고통을 함께 하시고 덜어주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을 알려 준다. 하느님의 아들은 불행을 쳐 이기기 위하여 고통을 당하셨다.
사실 이 세상에는 악이 있다. 우리는 현세에서 모든 악을 벗어날 수 없다. 하느님이 결코 윤리악(윤리악: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는 의지나 나쁜 행위/ 도덕악: 의지가 자진해서 도덕선 및 도덕률에 배반하기를 결당하는 일.)을 조성하지 않으시고, 물리악(자연악. 인간에게 해로운 자연(병, 천재), 또는 나쁜 제도나 풍속 따위 사회현상)이라도 그 자체를 위해 원하시거나 허용치 않으신다.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은 좋지만 고정되지 않았고 상처받기 쉽다. 그러나 하느님은 위로자시다. 

2. 악의 기원: 원죄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인간 타락의 이야기는 하느님께 대항한 인간의 첫 반항의 사실을 상징적인 말로 자세히 제시하고 있다. 성서는 그 죄악을 주로 교만과 불순종이라고 말한다.
아담과 하와는 그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로 하느님이 금하신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죄를 범하였다. 즉 하느님과 맺은 우정을 스스로 파기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는 그의 모든 후손에게, 즉 전 인류에게 미쳤다. 이렇게 첫 인간의 불순종과 교만으로 범한 죄를 원죄라고 한다. 각 사람이 물려받는 원죄는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범한 죄와는 다르다. 인간 본성은 타락하고 받았던 은총을 상실하고 본성적 힘도 손상되어 죽음의 권세에 예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 본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죄 중에 태어났다. 원죄가 전달된다는 것은 아담의 모든 후손이 성화은총(거룩하게 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는 은총)이 없이 그리고 성화 은총을 수반하는 특별한 은혜도 없이 창조된다는 뜻이다. 인간이 당하는 많은 슬픔은 결코 원죄의 결과만은 아니다. 사실 인간이 당하는 가장 가혹하고 견딜 수 없는 불행은 거의 다 인간의 계속적이고 고의적인 죄악의 결과다. 인간의 죄는 미리 정해진 것도 아니므로 피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다. 죄를 범함으로써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남용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타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깨우쳐주는 것은 책임의 의미, 죄의 중대성 그리고 하느님의 길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질 자유와 충분한 통찰력을 주셨다. 아담이 범한 죄의 결과는 하느님이 강하시고 정의로우시며 또 하느님은 당신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와 책임에 대해서 엄격하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3. 악마
타락한 인간이 있듯이 타락한 영들도 실제로 존재한다. 성서는 사탄을 유혹의 근원으로 묘사하고 있다(창세 3,1-5). 사탄은 배신자요 교활한 유혹자이다. 사탄은 감각과 상상과 강한 욕망, 공상적 이론, 혹은 인간 거래의 무질서한 접촉을 통하여 우리 안에 탈선을 가져오려고 하는 자이다.
하느님은 만물의 주님이시다. 악마가 어떠한 힘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서 제재를 받는다. 최종적으로 모든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여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로마 8,28). 사탄과 그 밖의 타락한 영들은 단순한 피조물들이다. 하느님은 그들이 악해지거나 악의 근원이 되라고 만들지는 않으셨다. 악마와 기타의 악령들은 하느님이 본래 선하게 만드셨으나 그들 스스로 악하게 되었다. 

4. 성실하신 하느님
첫 사람은 죄를 범하였고, 그 후손들은 죄 중에 그를 뒤따랐으나 하느님은 여전히 자비로우시다. "우리는 진실하지 못해도 그분은 언제나 진실하시니 약속을 어길 줄 모르시는 분이시다"(2디모 2,13).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 하느님은 구세사를 통하여 인간을 참회와 쇄신, 구원에로 거듭거듭 부르셨다. 하느님은 당신이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하느님은 마치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성실한 남편처럼, 그리고 아내가 성실치 못해도 계속 사랑하는 남편처럼, 당신 선민을 사랑한다고 거듭 말씀하셨다(호세 2,14-15. 19).
하지만 인간은 거듭 죄를 범하였고 죄가 가져오는 불행과 벌을 체험하였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인내로이 참으시면서 인간이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다. 인간과 사랑의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은,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써 계약을 파기할지라도 인간을 용서하시고 그들이 당신 품안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다.
하느님은 당신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치셨다. 이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대변자들이었다. 예언자들은 메시아가 가져올 구원에 대한 희망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구약의 예언이 실현되었다. 구약 전체의 모든 약속과 기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은 깊은 결함 투성이다. 인간은 거듭거듭 죄를 범했지만 하느님은 당신 자비로 축복을 상속받도록 아직도 인간을 부르신다. 사실 하느님은 죄의 사건을 보다 큰 은혜의 계기로 만드신다.   

 제 3편
6장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심


<요점정리>  
 ▨ 하느님이 보내 주신 구세주는 어떤 분이신가?하느님이 보내 주신 구세주는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다. 
▨ 예수 그리스도란 무슨 뜻인가?예수는 구세주란 뜻이요,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이', 즉 거룩한 기름으로 축성된 왕, 대사제, 예언자란 뜻이다. 
▨ 예수는 누구인가?하느님의 아들이자 하느님으로서, 인간이 되신 후에도 여전히 하느님으로 남아 계신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그분은 人性과 神性을 다 갖고 계시며, 죄를 제외하고는 인간과 똑같은 조건을 가지신 분으로서,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를 죽음에 붙이시고 부활하신 우리 구세주이시다. 
▨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성자)을 보내신 첫째 목적은 무엇인가?성자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어, 성삼위(聖三位)이신 하느님과의 친교로 이끄는 데 있다.

1. 예수님이 사시던 땅
예수님의 조상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강대국들의 침략을 받아 왔다. 기원전 587년에는 바빌론의 침략을 받아 수많은 백성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하여 유배생활을 반세기 동안이나 하였다. 기원전 539년,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팔레스티나 땅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그리스에 의해 재차 침략을 당하여 그 속국이 되었다가 연이어 에집트와 시리아의 속국의 신세로, 마침내 기원전 64년에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기원전 4년에는 로마가 대(大) 헤로데 왕의 아들들을 시켜 이스라엘을 네 등분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하시던 시대의 유대아는 기원 후 26년부터 36년까지 총독 본시오 빌라도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렇게 수탈과 침략의 역사를 살아 온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구해 줄 구세주를 기다렸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외세에 의해 침략 당하고, 안으로는 양반계급으로부터 수탈을 당하던 우리 조선시대의 백성들이 미륵세계와 그들의 구원자 정도령을 기다렸던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2. 예수님의 탄생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백성의 비천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구세주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며, 구세주에 대한 기대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널리 퍼져 있었다. 그들은 이 메시아(구세주)가 자기들을 정치적 억압에서 해방시켜 줄 위대한 다윗의 후손이며, 따라서 그의 출생은 특별한 징조를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때가 되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주셨다(루가 1,30-33). 그러나 그리스도(구세주)는 일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오셨다. 호구조사(戶口調査)를 위해 베들레헴에 갔던 마리아와 요셉은 "여관에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루가 2,6-7). 이같은 비천한 출생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비참함에 처음부터 동참하심을 암시한다. 

3. 성령에 의한 탄생
성서는 요셉이라는 나자렛 사람과 약혼한 마리아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 잉태했다고 전하고 있다. 마태 1,18-23절과 루가 1,26-45; 2,1-20절에서 우리는 예수의 탄생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영에 의한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알아듣기 힘든 하나의 신비로서 과학적으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이 우리에게 이것이 사실임을 알려 준다. 

4. 참 인간이신 예수
예수님이 영에 의해 출생했다고 해서 그는 우리와는 다른 인간, 영으로만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요한 1,14).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 인간의 정신, 인간의 의지, 인간의 감정도 갖고 계셨다. 예수님은 온전하고 완전한 사람이시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나약함, 목마름(요한 4,7)과 배고픔(요한 4,32)을 겪으셨고, 슬퍼함(요한 11,33), 불쌍히 여김(마태 15,32), 노여움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계셨다. 특히 예수님의 수난에서 그분의 인간성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그분은 정신과 육체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다.
예수님의 인간성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서 인간 본성이 가장 고귀하게 되고 또 그분은 인간 생활의 완전한 모범이기 때문이다(마태 11,29). 당신의 인간성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5. 하느님이신 예수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이시면서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우리의 주님이시다. 이미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명백히 불리고 있다.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 보이는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원한 말씀이시고, 그 말씀은 하느님이시요 또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분이시다.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부른 신약성서의 대목은 많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하느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이를 살리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보여 주셨다. 하느님의 지혜가 예수님 안에 있었다. 예수님은 만물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역할을 이행하실 것이다. 이 지상의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에 모일 것이고, 사람의 아들은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마태 25,31-46). 

6. 하느님의 아들(성자)이신 예수
예수님은 창조주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써 그분과 당신과의 관계를 계시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셨고,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셨다. 그러나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 아버지와 예수님의 본성은 같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탱하시는 영원한 사랑과 예지와 힘을 함께 갖고 계신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며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아버지를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낳으신 아들이시다. 예수님 홀로 당신의 영원한 아버지와 함께 신성을 완전히 소유하고 계신 하느님의 참 아들이시다. 

7. 하느님이시자 인간이신 예수
예수님은 사람이시고 또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느님의 아들로 존속하시고 또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때가 되어 인간 본성을 취하셨으며, 영원히 인간으로 존속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은 하나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완전한 일치와 평화를 가져다주시기 위해 동정 마리아 몸에서 인간 본성을 받으시었고, 그 인간 본성을 하느님의 아들의 위격(位格)과 일치시키셨다. 바로 이것을 '강생(降生)의 신비'라고 한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아들로 변형되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하느님의 아들로 존속하시는 그분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지만, 신적 본질을 조금도 잃지 않으시고 인간의 본질을 완전히 취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위격은 하나이고, 그 위격은 인간적 위격이 아니라 신격(神格)이며, 성삼위의 한 위(位)이시라고 교회는 가르친다. 예수님 안에는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제 2위와는 다른 인간적 위격이 없다.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신비이다.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다. 그래서 그분의 행위는 신적 자유의 행위이며 인간적 자유의 행위였다. 그분의 인간적 의지는 신적 의지에 의해서 위축되거나 말살되지 않았다. 인간성을 가지신 예수님은 가장 거룩한 수난을 통하여 우리를 위해 의화(義化/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이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의 공로를 세우셨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강생의 신비 전체 즉, 그리스도교의 중심에 놓여 있는 이 신비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사랑이다.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사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구원하게 하셨다. 창조의 목적 전체가 피조물을 성삼위(聖三位)와의 친교로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7장  예수님의 공생활



<요점정리> 
▨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 특히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타났다. 
▨ 예수님은 왜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셨는가?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특히 하느님을 모르고 방황하는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파견되셨다. 
▨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무엇인가?기적을 통하여 사람들을 하느님의 자비와 신앙에로 이끌기 위한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심이다. 
▨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의 주제는 무엇인가?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과 성부의 자비와 관대하심,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더 자세히 알고 보존하기를 원하였다. 이러한 소원을 채우기 위해 4복음서가 기록되었다. 현대에 와서 고고학과 역사학의 연구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때의 지리, 법, 정치, 사회 환경에 대한 신약성서의 기록이 매우 믿음직하다고 확증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서가 전해 주는 예수님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1. 예수님의 사명
딴나라민족들에게 억압을 받아 왔던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을 정치, 경제적으로 해방시켜 줄 구세주, 즉 '메시아'를 기다렸으며, 구약의 예언들은 바로 이러한 메시아에 대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예수께서 활동을 시작하실 때 많은 이들이 예수가 바로 자기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정치적으로 자신들에게 해방을 가져다 줄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것은 "가난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서이다"(이사야 61,1-2). 예수님은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인간에게 근본적 행복인 복음(福音)을 선포하시러 오셨던 것이다. 

2. 예수님의 공생활(公生活)의 시작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이끄심으로 사막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40일간 밤낮으로 단식하셨다(마태 4,1-11). 그 무렵에 예수님은 대략 30세이셨다(루가 3,23).
예수님이 사실상 공적으로 활약을 시작하신 것은 세례자 요한의 체포 소식을 들은 후였다. 예수님은 바로 헤로데의 영역에서 설교를 시작하셨다(마르 1,14). 예수님이 설교를 시작하자 추종자들이 따랐고,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모시며, 설교하는 곳마다 함께 여행하였다(마태 4,18-22).
예수님도 당신의 기쁜 소식 즉 복음을 듣고자 하던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고(마태 4,25), 때로는 사오천 명의 군중이 모인 곳에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인기에 대한 유다인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은 호기심에서 증오심으로 변하였다. 그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활동을 염탐하고, 혹은 공개토론에서 그분에게 도전하다가 결국은 그분을 살해하기 위해 음모까지 꾸몄다. 

3. 기적의 의미
예수님은 당신이 자라시던 곳에서 멀지 않은 작은 동네 가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신 후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요한 2,1-11).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접근하려는 더욱 강한 소망을 일으킨 것은 그분이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치유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놀라운 치유의 소문을 들은 병자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희망으로 삼았다.
예수님의 기적은 인기를 끌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기적은 인간의 절박한 구조와 요청에 대한 반응이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적과 신기한 일에 대한'(요한 4,48) 흥미만을 갖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기적은 하느님의 현존과 자비에 대한 신앙에로 사람들을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롭게 출발하도록 요청한다. 새롭게 된 인간들은 이 고뇌와 모순에 찬 세계 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그것에 대항해 갈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의미이다. 

4. 하느님의 나라
예수님은 모든 중요한 주제를 거의 비유(比喩)와 예를 통해서 설명하셨다. 예수님은 설교뿐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기도하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산상설교(山上說敎·마태 5장-7장)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하느님 나라는 한 마디로 말해서 하느님을 참 하느님으로 모시고 그분이 가르치신 것을 인생의 기준, 사회의 가치 기준으로 받들며 그것을 통해서 우리 세계에 정의와 평화의 질서가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 나라는 죽음 후에 다가올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지상에서부터 시작되고 준비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힘은 보잘 것 없지만 하느님의 창조사업 협력자로서 역할을 다할 때, 하느님의 나라를 이 지상에 세우는 것이다. 한편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할 우리에게 예수께서 호소하시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마태 22,35-40)이다. 이 사랑이 모든 예언서와 율법의 골자이며 요약이라고 하신다(마태 7,12). 사랑의 삶은 바로 하느님의 다스림의 표징이다. 

5. 예수님의 삶
사람들이 예수님께 매력을 느낀 이유는 그분의 행적 즉 생활자체였다. 예수님이 제안하신 것은 하느님과의 새로운 계약,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될 기회 등이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자비하시고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셨다.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서 우리 모두가 회개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과 봉사의 생활을 함으로써 작은 씨앗과 같이 하찮게 보이는 그 나라가 크게 자라게 된다. 그 나라는 세상의 권력과 같이 강제적인 폭력이나 억압으로 지배되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과 봉사로써 다스려지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계신다.
이제 우리에게는 결단만이 남았다. 이제까지 추구해 왔던 세속의 가치관을 버리고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하느님께 자유롭게 응답하여 참 삶의 생활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야 한다.



8장  예수님의 수난과 돌아가심


<요점정리> 
▨ 예수님은 무엇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는가?우리를 사랑하고 구속하고자 하심이니,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를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당신 가르침과 모범으로써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여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함이다. 
▨ 예수님은 왜 스스로 수난과 죽음을 받으셨는가?예수님은 아버지께 순명하시고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이 어찌하여 제사가 되는가?예수님이 대사제로서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제물로 바쳤으며, 이로써 우리 인간과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켰기 때문이다. 
▨ 예수님을 유일한 중재자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하느님이며 사람이신 예수께서 인간을 소외와 비참에서 구원하여 아버지와 화해하도록 하셨으며, 이러한 중재는하느님이신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1. 우리를 위해 수난하신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수난을 당하고 돌아가시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분 친히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셨다.
우리 주님의 수난은 반드시 있어야 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의도는 가장 완전하고 적절하게 구원을 이루시는 것으로, 인간이 하느님께 대항했기에 그 보상을 완전히 할 수 있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고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의 죽음과 수난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수난받으신 것은 당신의 영원한 아버지께서 원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자유로이 받아들이셨다. 

2. 구속자이시자 중재자이신 그리스도
이 세상에 보내어진 예수님은 완전한 구속자였다. 하느님의 참 아들이며, 인간이기도 한 그리스도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적절한 속죄행위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재자이시다. 하느님이며 사람이신 분이 인간을 소외와 비참에서 구제하여,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게 해 주셨다. 수난은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을 잘 드러낸 완전한 구속방법이었다.
초대교회는 구원의 복음을 설교할 때에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빛나는 무한한 사랑을 설교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고통은, 그분이 우리를 매우 사랑하셨기 때문에 더욱 혹독한 것이었다. 무한한 동정심으로 그분은 내적 고통과 외적 고통 등 인간의 모든 고통에 참여하고자 하셨다. 십자가 안에 구원이 있고, 십자가 안에 생명이 있으며, 십자가 안에 원수를 방어할 수 있는 힘이 있다. 

3. 예수의 반대자들
예수님께서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시고 그들의 구원을 선포하셨을 때, 그 당시 사회, 종교, 정치적으로 기득권(旣得權)을 가지고 있었던 지도층의 사람들, 즉 유다교 지도자들과 산헤드린(유다교의 최고 의결기구)과 로마 통치자들은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그분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에게는 위험스러운 것, 당시 사회 구조를 흔드는 불순한 것, 자기네 종교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본 뜻이 무엇인지를 찾기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반대와 박해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계속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자 하셨다. 그분은 비단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에게만 기쁜 소식을 전한 것이 아니라 부자와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도 기꺼이 하느님 나라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셨다. 이는 그분의 구원 소식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며, 당신은 모든 백성의 구세주이시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의 수난과 돌아가심
각 복음서에서 수난은 최후만찬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임박했던 당신 수난의 의미를 명백히 설명하셨지만, 그분의 제자들은 부활 후까지 그 뜻(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루가 24,25).
이 최후만찬은 당신이 곧 바치실 십자가의 제사를 미리 앞당겨 상징적으로 하느님께 바친 제사이다. 여기서 그분은 성체성사를 세우셨고, 이 성사를 집행할 사제직도 세우셨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으심이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을 것이라는 것을 똑똑히 말씀하셨다(마태 26,26-28).
최후만찬이 끝나자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과 함께 올리브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고, 곧 닥칠 고통에 대해 마음이 흔들리셨으나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하셨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42)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사제들, 헤로데, 빌라도 앞에서 부당한 재판을 받으셨다. 이 재판을 받으시면서 그분은 심한 모욕을 당하셨다. 또 베드로는 그분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잡아떼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고독과 처량함을 느껴야 했고, 어머니 마리아께서 한량없이 슬퍼하시는 것을 보시는 괴로움까지 겪으셨다. 그러나 우리 구원의 대사제이신 예수님은 인내와 위대한 정신을 잃지 않으셨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는 여러 가지 고통과 비애를 예수님께서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더욱이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5. 수난과 죽음의 의미
예수님이 받으신 수난의 결과는 영원하다. 그분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죄의 모든 결과에서 구원을 받았으며, 영생에로 인도하는 은총과 은혜를 모두 받게 되었다. 죄가 인간 위에 군림하였고(로마 5,21), 인간을 노예화 하였다(로마 6,7). 그러나 이제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났으며(골로 1,13-14) 사탄도 정복되었다.
그리스도의 돌아가심은 옛 법의 구속력을 끝냈다. 그 법은 거룩한 것이긴 하였으나 생명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 법은 죄를 피할 의무를 가르치면서도, 그렇게 할 힘을 주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로마 7,7-25). 육체의 죽음까지도 그리스도의 돌아가심으로써 정복되었다(1고린 15,54-57). 모든 죽음은 비극적 불행이 아니라 사랑의 절정이요, 새 생명의 입구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의 수난은 성부의 사랑을 드러내준다. 하느님 아버지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다"(요한 3,16). 하느님 자신이 인간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계시다는 사실과 예수님의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은 전 인류의 고통, 우리 매일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교 신앙이 싹트게 된다. 

6. 대사제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대사제이시다(히브 4,14). 그분은 공생활 중에 가르치시고, 죄를 사하시고, 성화하는 사제의 활동을 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완전한 제사를 봉헌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영원한 구원을 이룩하셨으며, 이전의 계약과 사제직을 폐지하셨다(히브 9,1-10).
그분은 사제로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기꺼이 바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제의 활동을 하실 때에 모든 사람의 대표자로서 성부 앞에 서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화해의 활동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을 가지고 인간의 죄를 위해 속죄하셨으므로, 죄로 말미암아 조성되었던 온갖 분열과 적개심을 해소할 수 있었다.
죄는 인간 소외의 가장 깊은 뿌리이고,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갈라 놓기 때문이다(에페 2,13). 죄는 사람들 사이에 불화와 적의를 조성하고, 개개인 안에 내적인 쓸쓸함과 비합리적인 생각을 야기하며(로마 7,23-24), 전우주와 죄인의 관계도 어색하게 하므로, 죄인은 세상 안에서 이방인이 된다(창세 3,17-19). 

7. 그리스도를 따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나 우리는 이 지상 생활 가운데 예수님의 구속사업을 완성시켜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신자가 되고 그리스도 신자답게 산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그리스도 신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 그 예를 적어본다. 
- 예수님을 따르는 일
-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
-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
- 예수님의 선포 내용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
- 예수님의 약속에 희망을 거는 것
- 예수님께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불쌍한 이들을 위해 일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도 그들의 해방에
   투신하는 일
- 예수님처럼 성령 안에서 성부와 친교를 나누며 기쁘게 사는 것 

9장  예수님의 부활



<요점정리> 
▨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사건은 무엇인가?예수님의 부활 사건으로, 예수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당신의 전능으로 영혼과 육신이 결합하여 부활하셨다.그리스도인은 이 부활을 믿을 뿐만 아니라 이를 생활로써 증거해야 한다. 
▨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엇을 가르치는가?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이 참 하느님이시고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드러내고, 우리도 장차 부활할 것을 가르친다. 
▨ 부활 후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셨는가?부활 후 40일 동안 가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도들에게 복음선포의 임무를 맡기시면서 교회 창립을 완성하셨다. 
▨ 승천의 신비는 무엇인가?부활 후 제 40일째 되는 날에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 편에 앉으시니, 이로써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에 참여하며,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활동은 중지하나 우리 주님으로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 
▨ 그리스도는 승천 후 어떤 식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가?성령을 통해 당신을 믿는 사람들 안에 현존하신다. 즉, 믿음과 기도생활 을 하는 교회 안에, 성찬례와 성사의 집행 중에, 당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현존하신다.

1. 부활하신 그리스도
"주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셨다…!"(루가 24,33-34). 부활사건은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후 사흘 만에 돌무덤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미리 말씀하신 대로(마태 16,21) 안식일 다음 날, 즉 일요일에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이 부활은 신앙생활의 중추가 된다. 가톨릭 교회의 신앙은 온갖 반대를 물리치고,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이 역사적 사건이며, 그만한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가르쳐 왔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
부활에 대한 성서 대부분의 증언은 성부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고 가르친다(마르 16,6; 루가 24,34; 요한 21,14; 로마 4,25; 1고린 15,4.12). 예수님의 부활을 성부의 인준의 표적이라고 본다면 예수님의 인성이 입은 영광은 성부의 업적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부활로써 예수님의 신적 능력이 완전히 드러나 영광을 받으신다.
부활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처형되어 참혹하게 죽은 한 사람이 생명에로 되살아났음을 굳게 믿는 것이다. 부활을 믿는다함은, 십자가에 처형된 그분이 만인의 주님이시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마태 28,18)이 그분에게 주어졌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당신 제자들에게 치명적 타격이 되었다. 제자들은 파스카 사건을 두고 미리 하신 말씀들을 알아 듣지 못했으며,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그분에게 걸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다음날 아직 동이 채 트기도 전에 먼저 무덤에 갔던 여인들이 그분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가져왔을 때도 사도들은 믿지 않았다(루가 24,11).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몸소 나타나시자 그들은 허깨비를 보는 것이려니 하였다(루가 24,37). 사도 토마스는 부활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고충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다른 사도들의 증언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자기 눈으로 뵙고 그분의 못자국을 손으로 만져보고, 자기들한테 나타난 그분이 과연 돌아가신 그분인가를 확인하지 않는 한 믿지 못하겠노라 하였다.
많은 이들이 예수의 빈무덤, 사도들의 증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도들의 기적을 보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데 급급하였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보면 부활 사건을 여러 방법으로 그럴 듯하게 설명해 보려는 인물들이 언제나 있었다. 
부활 신앙이 계속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정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증인들은 믿음직한 사람들이었다. 그분의 권능이 그들과 그들의 말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성 바울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을 보았던 인물을 많이 열거하고 있다(1고린 15, 3-8). 바울로가 고린토 1서를 쓴 것은 예수께서 돌아가신 지 30년도 채 되지 않을 무렵이었다. 바울로가 이 글을 쓰면서 언급하는 인물들은 대다수가 아직도 살아 있었으므로 그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는 본인들이 직접 다짐할 수 있었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오랜 세월을 두고 '발전해 온' 신조(信條)가 아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직후부터 놀랍고도 진지한 신앙과 활약이 일어났던 것이다.
성서는 한결같이 살아나신 예수님은 죽으셨던 바로 그분이라고 주장한다. 예수께서 당신의 육체를 갖고 현존하셨음을 강조하여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고 하시자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던 토마스도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다.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7-29)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육체를 가지고 계시면서도 부활한 육체로 계심을 확인시켜 주셨다. 이렇게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두 눈으로 뵈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몸을 만져보게 하여 당신이 몸을 갖고 그 자리에 계심을 확인하도록 하셨다(루가 24,39). 

2. 부활의 뜻
부활하신 사실은 근본적으로 중대하다. 성 바울로는 이를 단적으로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1고린 15,14.17-18).
사도시대의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이 예언의 성취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데 대한 성부의 답변이요, 죽기까지 순종한 종에게 내리시는 보상이라고 생각하였다(필립 2,7-8). 이리하여 영광을 입으신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특권을 얻으신 분으로 등장하신다. 부활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업을 성부께서 승인하시고 인준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성(人性)은 변화했다. 그분은 여전히 같은 예수님이요, 여전히 우리의 형제이시요, 우리와 같은 살을 나누고 계시지만 지금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1고린 15,45)이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과는 다른 육체를 지니신 것이다(요한 11,38-44). 부활한 육체가 참 육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완성의 처지에 있던 육체와는 다르며 그것을 초월해 계신다(1고린 15,42-54).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사람들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미리 만들어 놓으셨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인류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켜 '부패하지 않는 영적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1고린 15,20)이 되신 그분의 부활은 인간 변혁의 원형이시자 이 변혁의 시작이다. 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신앙에서 교회가 생기고 또 교회 안에서 신약성서가 생겼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는 그 자체가 예수님 부활에 대한 증언서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든 것은 바로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삶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늘 함께 계시려고 세상에 오시어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셨다가 마침내 부활하신 것이다. 

3. 승천(昇天)
지상에서 부활하신 몸으로 수차 발현하시고,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성령의 힘으로 여러 가지 지시를 내리신 다음"(사도 1,2), 예수께서는 "승천하셨는데 마침내 구름에 싸여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셨다"(사도 1,9). 그분은 부활하신 육체와 당신 영혼을 갖고 승천하셨다. 승천의 신비는 두 개의 다른 측면을 갖는다. 첫째는 예수님의 지금까지의 수고 수난이 환히 드러나 영광에 드시는 일이었고,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눈에 보이게 수행해 오신 당신의 봉사 직무를 종결지으신 시각을 말해준다. 루가는 부활과 승천 사이에는 40일의 기간이 있었다고 전했다(사도 1,3).
승천은 예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바꾸는 사건이다. 승천하여 이 세상을 등지고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에서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구애되지 않게 된 것이다. 영광을 입으신 생명에 드심으로써 그분은 모든 시간과 공간에 자리잡으시는 것이다. 

4. 부활한 그리스도의 현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성령을 통해서 당신에게 속한 사람들 안에 현존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존을 일시 거두셨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성령의 선물을 내려주시기 위함이었고(요한 16,7), 당신은 항상 교회와 함께 계실 것이다(마태 28,20). 신앙과 기도로 영위되는 교회의 생활에 그분은 현존하시며, 영광을 입으신 그분의 몸과 성사를 통한 만남에서 특히 함께 계신다. 우리의 사랑에 찬 생활에도 현존하신다.
이렇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죽음과 죄의 산물인 인간 사이의 소외, 억압, 착취, 분열을 타파하고, 일치의 성령을 따라 지역간의 적대감, 지역감정, 국수주의를 무너뜨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상을 하나로 만들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 4편
10장  성령(聖靈)


<요점정리> 
▨ 성령은 교회 안에서 무엇을 하시는가?성령은 교회 안에 항상 머무르시어 하느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도록 지도하시며, 신자 각자가 교회에 봉사하도록 적합한 은사(恩賜)를 주신다. 
▨ 특은(카리스마)이란 무엇인가?특은이란 성령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각별한 호의로 내려 주시는 예언, 영의 식별, 기적과 같은 몇몇 은혜를 말하며, 이러한 특은을 주시는 목적은 무엇보다도 공동체가 자라도록 하는 데 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는 사랑이시며 복되신 성삼위(聖三位) 가운데 다른 위(位)들과 구분되는 한 위로서 성부와 성자와 똑같이 참 하느님이시다. 또한 우리의 보호자이시며, 진리의 대변자이시다. 영원하신 성부와 예수께 보냄을 받으셔서, 하느님과 우리가 우정을 맺도록 하시며(2고린 1,22),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불어넣어 하나가 되도록 한다(로마 5,5). 이렇게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영원하시고 같으시다. 

1. 구약성서
고대 다신교(多神敎) 세계에 살던 이스라엘의 선조들에게는 한 분 하느님께서 세 위가 계시다는 삼위일체 신비가 아직 계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현존하신다고 구약성서를 통해 여러 가지로 암시하고 계신다. 야훼의 영은 예언자들에게 내렸고(이사 61,1), 그분의 충동을 받은 예언자들은 용기와 절대적 충성으로 야훼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다. 

2. 신약성서
하느님의 내면생활의 신비를 우리에게 밝혀 보이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구분되는 위격(位格), 창조된 모든 사랑의 근원이요, 본형인 성삼위 안의 사랑으로 나타나셨다(사목헌장 24).
성모님의 임신과 예수님의 탄생을 둘러싼 복음의 이야기에서도 여러 번 성령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마태오 복음에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마태 1,18). 요셉에게는 천사가 나타나서 "그의 태중(胎中)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라고 일러 주었다.
복음이 성령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성부와 성자에게서 구분되는 위격으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 것은 최후만찬과 부활 후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요한 14,16).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마태 28,19). 이상의 귀절을 보면, 성부와 성자께서 위격이시듯이 성령도 위격이시지만 성부와 성자와는 구분되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분이시라는 것도 알 수 있다. 

3. 초기교회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五旬節)에 성령강림을 가장 깊이 체험한 후 성령의 의의와 사명을 가장 분명하게 그리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 성령께서는 이미 활동하셨다. 그러나 성령강림날에 성령께서는 사도들과 하느님의 백성들과 같이 영원히 머물기 위하여 내려오셨으며(요한 14,16) 또 그날 교회는 사람들 앞에 공적으로 공포되었고, 설교를 통한 복음 선포가 백성들 사이에 시작되었다. 

4. 성령의 역할
성령은 교회,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몸의 '영혼'이시다. 교회 생명의 원천은 성령으로서, 성령은 모든 사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나 성사를 통해서 그 성사 특유의 은총을 받은 모든 이 안에서 활동하신다.
성령께서는 신자 개개인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의 메시지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말씀과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부르시고, 신앙으로 순종하도록 하신다"(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15).
성령이 항구히 교회를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인은 한 성령 안에서 성부께로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다(에페 2,18). 이 성령을 통하여 성부는 죄로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며, 마침내 죽은 육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시키실 것이다(로마 8, 10-11).
성령은 교회와 신자들의 마음을 성전으로 삼아 그 안에 거처하시고(1고린 3,16; 6,19), 그 안에서 기도하시며,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신다(갈라 4,6). 성령은 교회를 온전한 진리에로 인도하시고(요한 16,13), 교회를 가르치고 지도하시며, 당신 활동의 결실로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신다(에페 4,11-12). 

5. 성령의 선물
'성령의 선물'이라는 말이 특정한 의미로 쓰일 때는 은총의 생명이 성장하도록 이끄는 특별한 은혜들을 가리킨다. 전통적으로 성령의 이 은혜들을 슬기, 깨달음, 의견, 굳셈, 지식, 효경, 주님께 대한 두려움(이사 11,2-3)이라고 한다.
'특은'이라는 것은 성령께서 각별한 호의에서 내려주시는 몇몇 은혜를 뜻한다. 예언, 영의 식별, 기적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특은들은 이것을 받는 당사자에게 혜택을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선익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에페 4,12) 데에 뜻이 있다.
성 바울로는 은총의 선물들을 예언, 가르침, 지혜를 밝혀 주는 은사, 지식을 전해 주는 은사, 믿음, 병 고치는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 그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 등이라고 한다. 올바른 영적 선물은 모두 성령의 업적이다(1고린 12,4). 하느님의 은총과 호의는 "그리스도께서 나눠 주신 선물의 정도에 따라"(에페 4,7) 받는 것이다. 바울로는 은총의 선물들이 어디까지나 교회의 일치를 위한 것이지 분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역설한다. 각 지체가 특수한 선물을 받아가지고 있겠지만, 신앙과 사랑 속에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 써야 한다는 말이다(1고린 12,22-26).


11장  삼위일체(三位一體)



<요점정리> 
▨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성부, 성자, 성령 세 위(位)이심을 말해 준다.

1. 신앙의 신비로서의 삼위일체
삼위일체의 신비는 곧 하느님 자신에 관한 신비이다.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한 분이심을 믿는 것이며, 아울러 영원으로부터 같은 신성(神性)을 가지시면서 구별되는 세 위(位)가 계심을 믿는 것이다. 유일한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하느님이 여럿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이신 하느님께 세 위가 계시다는 것을 '삼위일체'라 부른다. 그 세 위의 이름은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은총을 통해 우리는 삼위와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삼위일체는 신앙의 신비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예수님의 증언을 통해서만 파악된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려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삼위일체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가 드러났다(루가 3,22).
삼위일체의 신조는 가톨릭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신조이다. 이 교리를 믿어야만, 그밖의 주요한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파악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비는 하느님의 아들이 육체를 취하셨다는 것, 그분이 성령의 능력으로 임신되셨다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한 분 하느님께 여러 위가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자 참 하느님이시며, 성부께 보냄받으셨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2. 구약 안에서의 삼위일체
구약성서는 유일하신 하느님이 계심을 분명하게 선포했다는 점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일부 선포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하느님께 여러 위가 계시다는 말은 없으며, 하느님의 내적 생명에 관해서도 계시하는 바가 없다. 하느님은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당신께 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셨다(계시헌장 2-4).
구약성서에도 하느님께는 구별되는 위격들이 계시다는 것을 희미하게 암시하거나, 그 계시를 준비하는 듯한 귀절이 몇 개 있다. 교부(敎父)들은 하느님을 지칭하는 복수명사(엘로힘)가 자주 쓰였다는 점과, 하느님의 이름과 속성을 세 번 거듭 부르는 일(신명 6,4) 등이 그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풀이하였다. 
3. 신약 안에서의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삼위일체 신비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세례를 주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최후만찬 자리의 설교에서 예수님은 극진한 애정을 나타내시며 삼위일체의 위격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성자이신 당신은 성부께 보냄을 받으신 분이며, 당신이 올라가시는 대신 성부께 청을 드려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17. 29-35; 2고린 13,13; 1고린 12,4-6)라고 하시며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
4. 삼위일체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는 구분되나, 성부와 성자와 똑같이 참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는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사랑이 있다. 그 지혜의 표현이신 이 말씀이 곧 성자이시다(요한 1,1-14). 성부와 성자는 가이없이 서로 사랑하신다.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는 사랑이 곧 성령이시다. 성령은 창조받지 않으신 분으로 성부와 성자와 함께 같으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으로, 완전한 성삼위의 사랑을 나누신다. 
성삼위께서는 드러나는 활동을 공동으로 하시나 특정한 영역에서는 성부, 성자와 성령의 일을 나누기도 하신다. 영원하신 성부께서는 영원한 계획으로써 성자를 지상에 보내시어 인류를 구원하도록 하시고, 또한 교회를 세우시어 성령이 보호하고 인도하여 사람들을 성화시켜 구원으로 이끄신다. 현세에 있는 한, 우리 인간의 머리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언어는 하느님께 관한 이 숭고한 진리를 표현하는 데는 너무나 미비하다. 삼위일체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은 공동체이신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을 드러내고 나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존재임을 체험해 가는 과정이다(요한 3,21).

12장  가톨릭교회



1.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시다 

<요점정리> 
▨ 예수님은 왜 교회를 세우셨는가?
예수님은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모든 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여 새로운 백성을 이루도록 교회를 세우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서 당신의 사업을 수행하게 하시려고 교회를 설립하셨고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봉사직과 진리를 전하게 하시었다. 교회라는 제도가 존속하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께로부터 유래하였고,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심을 언약하셨기 때문인 것이다(마태 28,20).
가톨릭의 신앙을 받아들임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대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제가 성사를 집전할 때에, 사제를 통해서 성사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교회가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줄 때에,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고 신앙에로 부르시는 분은 다름아닌 그리스도이심을 깨닫는 것이다. 가르치고 다스리는 교회의 권위에서 그리스도의 사목활동을 인식하는 것이다.
보이는 외형적인 교회와 안 보이는 영성적인 교회, 둘이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가 있을 따름이다. 보이는 교회 안에서 또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행동하신다. 

2.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요점정리> 
▨ 하느님은 어떻게 당신의 새로운 백성을 부르시는가?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고 완전한 계약을 이루심으로써 모든 이를 당신의 새로운 백성으로 부르신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9~17)이라고 한다. 이 말은, 교회란 성직자들의 집단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모든 신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우리 모두가 교회이며,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요한 3,5-6) 드디어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서 전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1베드 2,9-10; 교회헌장 9). 
교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이들의 소명과 책임과 직능이 다르지만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고 일치된 백성을 이룬다. 세례 때에 같은 성령을 받고, 하나의 성체로 양육받으며 같은 희망을 함께 나누고 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품위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점이 하느님 백성의 기본 특성이다. 

3.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
'백성'이 교회가 된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한데 뭉쳤기 때문이다. 모임을 만드시는 분은 주 예수님이시다. 교회 내의 권위와 직무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며, 따라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은총을 베풀고, 그 선물들을 보관하는 데 교회 직무자들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심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면서 그분을 닮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처럼 가난한 이들, 억압받은 이들, 죄인들과 함께 있어야 하고 그들을 섬기며, 그들을 위해서 투신(投身)해야 할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그리스도처럼. 

4. 가난하고 소외된 이의 교회
교회가 제도화되고 거대화되면서 돈 많은 이들, 권력 있는 이들, 학식 있는 이들이 교회의 주된 구성원이 되는 경향을 우리는 가끔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이 더욱 구체화되어,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감싸기를 그만 둔다면, 이는 복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것이다. 또한 교회가 더욱 더 대형화되고, 성직자, 수도자와 교회 지도자들의 생활이 호화롭게 된다면, 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하겠다. 교회는 그리스도처럼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 도시빈민, 실업자, 외로운 노인, 떠돌아다니는 사람, 노동자, 농어민을 내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야 한다. 일반 사회에서는 가난한 자가 부자를 섬기지만, 교회는 부자가 가난한 자를 섬기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5. 교회와 하느님 나라
교회와 하느님 나라는 엄밀하게 말해서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가 지상에서 실현되는 모습이며, 그 나라의 최종적 완성은 영원한 세계에서 보게 된다(교회헌장 5). 하느님의 통치가 그러하듯이 그분의 나라는 영적인 것이며, 마지막 날에 가서야 완성을 볼 것이다.
세상이, 비참한 생활과 착취와 전쟁과 사회분열과 인간차별과 인종차별에서 벗어나게 되리라는 약속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다. 교회는 이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누룩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인간 사이의 친교를 막는 온갖 벽들을 허물면서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가지는 세상을 건설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금방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약간의 누룩이 전체 밀가루 반죽을 부풀리듯이 교회 또한 세상의 변화를 위한 새 누룩이 되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 교회 구성원 각자는 사회, 정치, 경제 문제에 각자 자기의 처지에 따라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6.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므로 교회 자체는 거룩하지만 그 교회는 나약하고 죄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신부(新婦)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교회는 충실한 배필로서 항상 진리를 가르치고, 거룩함과 구원의 원천에로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자모이신 성교회'라는 표현은 교회 초창기부터 사용되던 문귀이다. 교회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까닭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무수한 자녀들을 낳기 때문이다(교회헌장 12). 모든 신자가 교회에게서 태어났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시켜 우리 생명을 양육하시는 만큼 우리는 교회를 우리의 '어머니와 교사'로 받드는 것이 당연하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끊지 못할 인연으로 결합된 충실한 신부임을 깨닫고,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돌보고 계심을 깨닫는 사람이라면 교회에 다함없는 충성을 바칠 것이다. 

7.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의 교회 

<요점정리> 
▨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결합되는가?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되고,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 이 몸 안에서 서로 결합된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신비체)'으로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다(교회헌장 7). 성 바울로는 여러 편지에서 신비체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여러분은 다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1고린 12,27). 몸에는 눈과 귀 그리고 손발이 각기 다른 구실을 하듯이 우리도 교회 안에서 다른 역할을 맡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몸에서 어떤 이는 사도가 되고, 어떤 이는 가르치고, 어떤 이는 관리하며, 다른 이들은 보다 낮은 직능을 맡는다(1고린 12,28-31). 그러나 모두가 가장 위대한 은총의 선물과 본분, 다시 말해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영광에로 부름받고 있다(1고린 13). 
그리스도께서 이 몸의 머리이시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는 것을 말하며, 더욱더 그리스도와 같아지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더 깊이 스며듬을 말한다. 우리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한다면 교회를 더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8. 교회의 특징 

<요점정리> 
▨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가톨릭 교회이다.
초세기의 여러 신앙 고백문에는 가톨릭 교회가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한다. 이 특성들은 교회의 본질이다. 
(1) 하나인 교회
교회는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자들이 믿고 고백하는 신앙에 있어서 하나이다. 이 교회는 본질적으로 단일한 예식을 갖고 있다. 모든 이가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단일한 구원의 희생제사에 함께 모이며, 모든 이를 그리스도 안에 일치시키는 한 덩어리 빵을 나누어 먹는다. 전세계에 두루 퍼져 있는 교회 의 여러 부분들간의 친교(親交)에서도 하나됨이 드러난다(요한 17,20-23). 
(2) 거룩한 교회
교회는 거룩하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으로부터 모든 거룩함이 흘러 나온다.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가 성스러운 것은 그분 때문이다. 교회의 예배도 거룩하다. 그리고 교회가 자기 백성들에게 베푸는 성사들은 그 백성이 그리스도인다운 거룩한 생활을 하게 만든다. 교회는 거룩한 생활에로 만인을 초대한다(교회헌장 39-42). 충실히 가톨릭 신앙 생활을 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함의 열매를 맺어 주신다.
교회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백성들이 인간의 나약성과 불완전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에 그런 불완전성과 죄의 흔적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러나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 거룩하시기에 교회 자체는 거룩하다. 
(3) 보편된 교회
교회는 보편되다(가톨릭). 가톨릭 교회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사는 만인을 위한 교회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바를 빠짐없이 가르쳐 왔다는 점에서도 교회는 보편적이고 공번되다. 
(4)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 온다. 사도시대의 교회와 똑같은 공동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셨다. 교회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것은 그 후계자들에 의해서 다스려져 온 까닭이다. 또 사도들이 가르친 것과 똑같은 교리와 생활의 길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한다. 

9. 교계제도 

<요점정리> 
▨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직무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직무는 사도들과 그 후계자(주교)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백성을 가르치고 지도하며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성직자로 이루어진 교계제도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교계제도를 두기로 하신 것은 당신이 위임하신 주교들과 사목자들을 통해서 백성들을 다스리기로 작정하셨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모두 신앙과 사랑 그리고 영생에로 불리우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소명을 받고 있다. 그러나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서 조직적인 교계제도가 필요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공동체를 지도하는 봉사직이다.
예수님은 공생활 초기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루가 6,13). 교회 내의 위계(位階)에 관해 별도로 나오는 신약성서 귀절은 없으나 사도들과 그 동료들은 특수한 직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시몬이 당신을 메시아로 고백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거룩한 새 직분을 내리시고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셨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인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반석 또는 기초로 삼아 당신 교회를 세우시겠노라고 약속하셨다.
부활 후 예수님은 배반했던 베드로를 시켜 사랑의 고백을 세 번 하게 하신다. 그리고 모든 양떼를 거느리는 목자와 지도자로서의 직분을 주신다(요한 21,15-17). 베드로에게 부여된 양들을 돌보는 직분은 교회를 다스리고 인도하는 직분이었다.
신약성서는 교회 내에서 베드로가 차지하는 극히 예외적인 직분을 여러 모로 시사한다(루가 22,32).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교회에 행사하시던 권위와 비슷한 권한을 베드로와 함께한 사도단에게 위임하셨다(마태 18,18). 사도들은 세상을 회개시키기 위해 사방에 파견되었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사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도 모두 죽을 인생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은 세상 끝날까지 지속되어야 했다(마태 28,20). "이 때문에 사도들은 교계제도로써 조직된 이 단체 안에 후계자들을 세우기로 노력하였던 것이다"(교회헌장 20). 교회 초창기부터 사도들에게 임명받았거나, 사도들을 계승한 주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를 다스리고 수호하는 정당한 목자로 인정받았다. 
(1) 교황권
교황과 주교와 사도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대체하는 인물이 아니다.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통해서 당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돌보시는 것이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서 사도 베드로의 직분을 계승해온 후계자들이 있다는 것과 로마 주교가 세계 교회 위에 베드로의 수위권을 계승한다는 것을 장엄하게 교리로 선언하였다.
교황은 전체 교회에 대해 관할권을 갖는다. 그는 로마의 주교일 뿐만 아니라 세계 교회의 주교이다. 하느님 백성은 누구나 이 으뜸가는 목자의 사목적 지도에 따라야 한다. 교황의 권위와 의무는 신앙의 가르침과 윤리 도덕의 교리는 물론이려니와, 교회의 규율과 통치에 관련된 일에도 미친다.
(2) 주교단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주셨지만 단독으로 교회를 사목하는 것이 아니고, 동료 사도들과의 일치 속에 사목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 사도들의 임무를 주교들이 계승한다. 그와 같이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인 교황은 사도들의 계승자인 주교들과의 일치 속에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다. 교회 초창기부터 신앙의 순수성과 단일성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주교들이 함께 모여 공의회를 소집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전 교회의 방향을 결정해 왔다. 주교들간의 '교류'는 전체 교회를 한데 묶는 친교의 표지이자 표현이었다.
주교들의 단체성이 가장 생생하게 보이는 때는 공의회를 소집하여 함께 모이는 경우이다. 지금까지 스물 한 번 개최된 이 공의회에서 전세계의 주교들은 한자리에 모여 교회의 교의나 규율문제를 상의했다. 그리고 새 제도도 만들었는데 이것이 곧 '주교 시노드'이다. 이 주교 시노드는 전세계의 주교들을 대표하는 주교들의 모임으로서 교황이 소집하며,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안문제와 사목문제를 협의한다. 

10. 교회 안의 구원
성 치쁘리아노는 이미 3세기에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친 바 있다. 그리고 교회는 항상 이 교리를 가르쳐 왔다. 하지만 이 말이 자기 탓없이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교회생활에로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마르 16,16)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뜻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충심으로 지키겠다는 지향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영생의 희망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또한 그 원의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서 성원의 자격까지도 누리고 있는 것이다(열망의 세례). 

 제 5편
13장  그리스도의 사목활동


1.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통해 가르치신다
그리스도는 당신 백성의 교사이시다. 공생활은 가르치는 일로 다 보내셨다. 그분은 하느님의 진리를 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이셨다. 예수님은 당신이 파견하신 사람들을 통해서도 가르치신다(루가 10,1; 마태 28,20). 따라서 당신이 보내신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단지 그 사람들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을 저버리는 것이며,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곧 당신 말씀을 듣는 것이다(루가 10,16).
인간은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다. 하느님은 만물을 통해서 당신을 계시하시지만, 인간은 자기 능력으로는 하느님께 대한 확실하고 자신있는 지식을 얻기 힘들다. 그리고 인간이 하느님을 어느 정도 알 수는 있어도 인간 지식만으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완전히 내주시는 아버지라는 것을 알아낼 수는 없다(계시헌장 6).
예수님이 하느님에 관한 진리를 말씀하시고, 하느님의 선하심을 몸소 증명해 보이시므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그분의 신성(神性)을 알게 되고, 인간의 한정된 언어를 통해서 하느님의 무한한 진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당신 말씀을 설교하는 임무를 사도들에게 위임하셨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들을 감도하시어 그들이 말하는 것이, 모두 진실한 말이 되도록 하셨다. 또 만민을 당신 제자로 삼아, 하느님의 말씀을 믿게 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사도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태 28,20). 

2. 교회를 통해 가르치시다
그러나 사도시대가 끝나면서 새로운 공적 계시가 내리는 시기도 끝났다(계시헌장 4). 사도시대 이후 교회의 임무는 오로지 사도들에게 맡겨진 신앙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이며, 말씀을 개발하며, 말씀이 온 땅을 새롭게 만드는 누룩이 되게 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시고, 끊임없이 보살피시고 은총을 내리시어, 당신 백성이 당신을 알아뵙고, 사랑하며, 복음의 뜻을 깨닫게 하신다는 점에서는 아직도 계시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이 결코 있을 수 없으며(갈라 1,6-8), 교회가 항상 설교해 온 메시지도 바로 이 복음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사도들을 계승한 교사와 신앙의 증인들을 통하여 간직되어 왔다. 진리를 수호하는 주교들은 성령의 보우를 받을 것이다. 그들이 특별한 계시를 받은 것은 아니나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말씀을 분명하게 설교할 수 있는 것이다(계시헌장 8).
교회가 전달하는 교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살아 움직이는 신앙을 가르치고 또 믿는다. 시대가 흐를수록 교회는 기도와 연구 그리고 성령의 보우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깨닫기에 이른다. 교리가 발전한다고 해서 어느 교리가 폐기되거나 옛 교리를 새 교리로 대치한다는 말은 아니다. 한때 교회가 강력하게 내세우던 것을 후일에 부인한다는 뜻도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일단 선언한 거룩한 교의의 뜻도 항상 그대로 고수되면서 여태까지 믿어온 것을 그대로 믿는다.

3. 믿음의 교사들
그리스도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통해 복음을 가르치셨다. 가톨릭 교회는 교황과 주교들이 사도들을 계승한 신앙의 공식 교사들이요 신앙의 증인들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교회를 가르치도록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증인들이다. 그리고 교사로서의 교황과 주교단의 가르침에는 하느님께서 그르치지 않는 진리의 은사를 내리셨다(교회헌장 25). 사제들은 주교의 공식 파견을 받은 인물로서 복음을 설교한다. 신학자들과 다른 학자들도 말씀을 가르치며, 말씀의 깊은 뜻을 통찰하도록 교회를 돕는다. 사제들은 주교를 돕는 매우 중요한 협조자들이다.
신앙의 또 다른 교사들은 부모이며, 그들이야말로 "자녀의 첫째이며 주되는 교육자로 인정되어야 한다"(그리스도교적 교육에 관한 선언 3). 성 아우구스띠누스는 부모를 집안의 주교로 비유한 바 있다. 학교와 교리교육 기관에서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들도 매우 중요한 교사들이다. 

4. 교회의 가르침과 그 무류성 

<요점정리> 
▨ 교회의 무류성은 무엇을 뜻하는가?
교회가 신앙이나 도덕에 관한 것을 판정할 때마다, 예수 친히 허락하신 대로 성령의 특별한 보호를 받아 그르칠 수 없으니 곧, 교황이 교좌(敎座)에서 선언할 때와, 주교들이 공의회에서 교황과 한 가지로 판정할 때 그러함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진리를 온전히 알아듣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한 16,13). 그리고 '믿는 교회'나 '가르치는 교회'는 계시된 진리를 믿거나 가르치는 데 있어서 그르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계시의 '위탁물' 전체를 어느 것이든지 그르침 없이 가르칠 수 있다.
신앙을 통해서 당신 지식에 교회를 참여시키시는 하느님은 당신의 무류성(無謬性)에도 교회를 참여시키신다. "성령의 도유를 받는 신자공동체는(1요한 2,20-27) 믿음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없으니 '주교로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가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같은 견해를 표시할 때에 백성 전체의 초자연적인 신앙심에서 그 특성이 드러난다"(계시헌장 12). 교회의 그르치지 않는 신앙은 신도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선물이다. 

5. 통상교도권과 특수교도권
주교들은 복음을 설교하고, 자기 관할에 속하는 신자들의 교리교수를 감독하며, 기도와 신앙을 실천하여 생활하도록 하며, 예배 양식을 감독하며, 훈령과 사목교서를 통해서 신자들의 구원을 얻기 위해 믿고 실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지도한다. 이러한 일들이 주교들의 '통상 교도권'이다. 주교 개인의 모든 가르침에 무류성이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백성의 공인된 교사인 주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류 없이 선포할 수 있다.
교회의 '특수 교도권'은 두 가지로 행사되는데, 이것 역시 그르칠 수 없는 것이다. 첫째는 공의회에서 행사된다. '전체 공의회'라고도 하는 이 회의에서 전 주교단이 교황과 함께, 전체교회의 신앙에 관한 것을 결정내릴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교황이 '교좌'에서 교리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6. 공의회
사도시대 이래로 큰 이단과 불화가 일어날 때마다 주교들은 공의회를 가졌다. 그리스도 교회의 모든 교사들이 일치하여 계시진리라고 가르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지니는, 오류 없는 확실성을 갖는다.
공의회에서 결정한 것이 모두 오류없는 가르침이라는 말은 아니다. 공의회의 어떤 결정은 규율에 해당한다. 그러나 같은 진리가 보다 적합한 다른 방법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교회 교도권이 작성한 교리의 공식 문항은 계시진리를 적절하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7. 교황권 
(1) 교황의 수위권
우리나라에서 천주교라고도 불리우는 로마 가톨릭 교회는 로마주교를 중심으로 한 교회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의 각 도(道)에는 도지사가 있어서 그 지역의 행정을 도맡고 있듯이, 가톨릭 교회도 지역별로 나뉘어 있으며, 각 지역의 교회는 주교(主敎)가 다스리며, 사제들은 주교의 보조자로서 지역 교회 안에 있는 성당에서 주교의 대리자로서 일한다. 각 지역의 책임자인 모든 주교는 서로 동등한 권한과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 세계 교회의 일에 있어 서로 협조한다. 세계에는 수많은 주교들이 있으나 이 가운데 로마 주교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도 로마라는 지역 교회의 주교로서 다른 주교들과 다를 바가 없으나, 성 베드로가 로마의 첫번째 주교였으며, 로마 주교는 성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점에서 특별한 권한을 행사하니, 이를 수위권(首位權)이라 한다. 이 수위권은 교회의 창설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권한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의 대표인 베드로를 향하여 교회의 반석이라 부르고, 그 반석 위에다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그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하였다(마태 16,18). 이러한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이루어졌는데 부활한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라"고 세번씩이나 당부하셨고(요한 21,15-17), 이러한 베드로의 수위권은 그를 계승한 로마의 주교, 즉 교황들에게 전수된 것이다. 
(2) 교황의 특별 교도권의 무류성(無謬性)
교황은 주교단의 단장으로서 다른 주교들과 함께 전 세계 교회에 교도권을 행사하지만 교회의 최고 목자의 자격으로 단독적으로도 교도권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경우를 교좌(敎座)선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교황의 단독 선언이 오류가 없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들이 채워져야 한다.
① 전체 교회의 최고 목자로서 공식으로 선언한다. 따라서 교황도 개인자격으로나 로마 교구장의 자격으로 선언한 것은 무류하다고 보장할 수 없다.
② 어떤 진리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의사를 밝혀야 한다. 따라서 교황의 통상적인 설교, 지도, 권유, 해설, 반박, 경고 등이 다 무류하지는 않다.
③ 신앙이나 도덕의 문제에 국한한다. 따라서 교황이 아무리 강력하게 주장할지라도 과학, 예술, 인문, 정치, 경제, 사회 등에 관한 주장이라면 오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8. 교회의 가르침과 신자들의 태도
가톨릭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과, 그 안에서 가르치시며 신비를 알려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가톨릭 신자는 교회의 유권적 가르침을 전부 받아들일 것이다. 교회가 무류권을 행사하지 않을 경우에도 그 가르침에 수긍할 것이다. 교황의 회칙은 전 교회를 상대로 장엄하고 엄숙한 양식으로 발언하는 문서이므로, 신자들은 특히 존경을 갖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 문서에서 전 교회의 최고 목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님의 양 무리 전체에게 발언하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는 하느님께서 사도들의 후계자들에게 신앙과 교회의 종교생활을 지도하는 권위를 주셨다고 믿고 있으므로 교회의 예외적인 결정만 따르지 않고, 신앙과 규율에 관련된 교회의 일상생활에도 순순히 따른다. 
교회의 법과 교황과 주교들의 합법적인 명령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백성의 선익을 위해 교회에 부여하신 권한(마태 16,19; 18,18)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그 법과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각국의 주교들은 가톨릭 신자들의 특수한 의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항목을 열거하여 '교회법규'를 내놓는다. 교회법규라고 하면 주일과 의무적 축일에 미사에 참례할 것, 교회의 유지비를 부담할 것, 정한 날에 단식재와 금육재를 지킬 것, 적어도 1년에 한번은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 할 것이며, 교회가 정한 혼인법을 준수할 것 등이다. 

14장  세계교회사



여러분이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세계교회사를 알아야 할 것이며, 세계교회사를 공부하는 동안 가톨릭과 개신교와의 관계, 가톨릭과 동방교회와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교회가 다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교(기독교)이면서도 왜 여러 교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발전사, 그중에서도 특히 가톨릭교회의 발전사를 살펴 세계교회사를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어느 정도 알고 나서 우리는 다시 한국에서 가톨릭이 어떤 식으로 발전해 왔는지도 공부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우리나라에 수용될 당시 사회적, 정치적, 사상적 여건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이를 용감하게 받아 들이고, 또 전할 수 있었던 우리 조상들의 구도모습과 한국천주교회의 발전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찾아 얻은 진리에 대한 더 큰 관심을 가지고, 더욱더 적극적인 신앙자세를 가다듬고자 한다. 

1. 사도시대~사도 후 시대의 교회
가톨릭교회의 역사는 30년경 유다교의 축일인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베드로를 중심으로 군중 앞에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면서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러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이들이 사도들을 중심으로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유다교 예배에 참여하였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유다교 종파 중의 하나로 보았다. 그러나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신들만의 예배, 즉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거행하면서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사도단과 그들을 보좌하는 이들로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그분의 기쁜 소식을 열심히 전하였으니,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루살렘 밖으로까지 전파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이들을 그리스도교인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유다인들을 중심으로 전파되던 그리스도교는 차츰 그리스인, 로마인들에게도 전파되었으며, 사도들과 성 바울로와 다른 여러 제자들의 열성적인 선교활동 덕분에 로마제국 안에 있는 큰 도시들 대부분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는 유다인들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외국인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날로 커져 갔다.
이들 초기교회 공동체는 아직도 유다교의 전통을 어느 정도 따르면서도 나름대로의 교리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사도들이 죽은 후, 2세기로 접어들면서 주교를 중심으로 하여 장로(사제)와 부제들이 보좌하는 지역공동체(교회)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 공동체들은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교리문제를 해결하면서 급속도로 로마제국 안에 퍼지게 되었다. 교회가 발전하면서 로마 황제들과 잦은 마찰이 있게 되면서 2세기부터 4세기 초에 걸친 대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를 낳게 되었다. 

2. 종교 자유 시대의 교회: 5대 교회의 형성
수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거듭하던 교회는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에서 내린 칙령에 의해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이후로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 황제들의 호의적인 도움을 받으며 세계적 종교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29년에 포고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였고, 이러한 국교시대를 맞이하여 그리스도교는 여러 분야에 걸쳐서 발전하게 된다. 이때 많은 수도원이 창설되어 영성에 대한 도움을 주었으며, 공의회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조직으로 등장하였고 신앙생활의 활성화로 인하여 전례가 발전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밖의 교리 논쟁 등은 여러 공의회를 통하여 해결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정통 가톨릭 교리가 정립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당시 로마제국 안의 큰 도시들에 세워진 교회들은 훌륭한 주교들과 학자들의 영향으로 전례와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위의 작은 지방교회들은 이 큰 교회들로부터 전례와 신학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어느 일정한 지역 전체에 영향을 행사하는 큰 교회들이 생겨났으니, 이들 교회들을 총대주교좌(總大主敎座) 교회라고 불렀다. 5세기에 이들 총대주교좌 교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 예루살렘에 있었다. 이들 교회들은 서로 협력하면서도 각자 서로 다른 역사를 걸어가면서 발전하였다. 로마를 제외한 다른 교회들로부터 파생된 교회를 우리는 현재 동방교회들이라고 일반적으로 부르고 있다. 

3. 로마교회(서방교회)의 발전
5세기 중반기는 로마의 국경지대에 게르만족이 이동하면서 로마제국을 멸망시키자 그리스도교 자체도 붕괴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본래의 사명인 선교 열의를 잃지 않고 영국에 선교사를 파견함과 동시에, 프랑스와 독일 지역의 새 주인으로 등장한 게르만족을 개종시켰으니, 이로써 고대 그리스 문화권과 게르만 민족이 융합하여 새로운 중세문화를 탄생시켰고,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고유한 민족적 특성을 지니면서 같은 신앙 위에서 일치된 중세기 그리스도교의 기원이 된다. 

4. 중세 전기의 교회(750∼1054년)
게르만 민족의 이동과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의 융합이라는 과도기(450∼750년)를 거치면서 시작되는 중세기(750∼1300년)는 시대적으로 양분(兩分)될 수 있다.
중세 전기에는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이 창설되었고 종교적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 교세의 확장과 교황령(敎皇領)의 탄생 등, 외적 발전이 이룩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로부터 물질적인 혜택을 받은 반면에 황제의 내정간섭을 받아 교권이 약화되고 교회가 세속화 되었고,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가 밀착되었던 프랑크 제국이 정치적으로 붕괴됨으로써 교회의 권위와 교황의 권한이 쇠퇴하는 교회의 암흑기를 맞게 된다. 암흑기 동안에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로마 귀족의 지배를 받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교회 내정간섭으로 자율성을 잃게 된다. 아울러 성화상 파괴 논쟁으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신학적 충돌을 하였고, 교리 논쟁 이후로 서방 라틴교회와 동방 비잔틴교회는 각기 다른 노선으로 발전하게 된다. 
(1) 성화상 파괴 논쟁
동방교회들 안에서 5∼7세기에 대중 신심으로 크게 유행하였던 성화상 공경이 신도들을 우상숭배로 빠지게 할 염려가 있다 하여 성화상들을 파괴하는 운동이 100여 년 동안(726∼843년) 지속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제국 안에서 교회박해, 폭력사태, 정치적 혼란 등 사회소요가 야기되었다. 성화상 공경을 찬성하는 서방교회(로마교회)와 이를 금지하는 동방교회 사이에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843년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에서 성화상 공경을 부활시킴으로써 성화상 논쟁이 끝났다. 
(2)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결별(1054년)
남부 이탈리아에 위치한 교회의 영향력 행사를 둘러싸고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교회와의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1054년 서로를 파문하는 가운데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으니, 이후 동·서방 교회는 1965년 서로의 파문을 철회하고 화해하기까지 결별상태에 있게 되었다. 

5. 중세 후기 교회(1054∼1300년)
중세 후기에는 클뤼니 수도단체의 개혁과 그레고리오7세의 교회쇄신으로 교회는 세속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할 뿐 아니라 세속권을 지배하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개혁운동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각성시켰고, 평신도의 영성강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는 11세기에 시작된 십자군운동과 청빈운동에서 나타난다. 십자군운동은,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지순례에 불편을 느끼고 있던 중,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1세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서방교회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교황 우르바노2세는 1095년 두 차례의 종교회의에서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에 이를 호소하였다. 이때 동방교회를 돕기 위한 염원과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하려는 열망은 국가란 장벽을 넘어 서구 세계를 단결시켰다. 이 십자군운동은 대중의 종교적 운동으로 시작되어 몇 세기 동안 8차례 (또는 4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십자군운동은 그리스도교적인 목적을 위하여 일어났지만 기사들의 모험심, 명예욕 등의 세속적 동기도 있었다. 그리고 기사들의 활력은 비그리스도교적인 광포로 나타나 십자군 운동을 중세의 한 잔인한 현상으로 변질시키기도 했다. 십자군운동으로 인해 기사 수도회가 탄생했으며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이 가능했고, 학문, 특히 스콜라 철학과 신학, 예술의 발달에 이바지 한 점 등이 그 긍정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6. 종교개혁 전야(前夜)의 교회
14∼15세기(1300∼1500년)에 있어서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중앙집권의 정치체제 또는 지방분권화의 정치적 상황으로 단일성을 상실하였다. 또한 교회는 일련의 대사건 즉 교황청의 아비뇽 환도(遷都)와 대분규(大紛糾, 西歐의 大離敎)로 인한 교황권의 약화로 말미암아 공의회 우위사상의 흐름 속에서 이단 운동이 발생하여 혼란 속에 빠졌다.
프랑스인들이 교황으로 뽑히면서 그들이 프랑스의 아비뇽에 머무는 70여 년 동안(1305∼1377년) 교회는 중심을 잃고 크게 흔들렸으며, 교회 개혁 또한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로마로 다시 천도한 이후에 교회는 큰 위기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세 명의 교황이 선출됨으로써 서로가 자신을 정통 교황이라고 주장하게 되고 이로써 교회 전체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콘스탄스공의회(1414∼1417년)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렸고, 이로써 분규는 끝났으나 그 후유증은 오래 남았으니, 영성의 쇠퇴, 신학의 퇴보, 교회 쇄신 작업의 실패로 교회는 날로 흔들려 갔다. 
한편 일반대중의 신심생활은 매우 활발하였으며 이는 수많은 성당의 건립, 자선활동, 신심서의 보급확대, 모국어 성서의 번역, 새로운 신심의 번창에서 볼 수 있다(묵주 기도, 십자가의 길, 성지순례 등). 그러나 이 시대의 신심은 개인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고, 현세적 두려움을 피하고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치중하여 미신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 교회 안에서는 비난과 함께 개혁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지기에 이른 것이다. 

7.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의 수사신부이며 성서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대사(大赦) 남용에 대해 항의하면서 대사 교리의 재정립을 제의하기 위해 그의 교구장과 동료, 교수, 신부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는 유명한 95개 조항의 신학명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정통신앙의 뿌리를 뒤흔들어 놓았으며 그리스도교 교계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분열시키는 종교개혁 시대를 열게 되었다. 여기서 마르틴 루터와 대사남용에 대하여 잠시 살펴 보자. 
(1) 마르틴 루터
아우구스띠노회의 수사신부(修士神父)였던 루터는 대사(大赦) 남용에 충격을 받고, 그는 1517년 교회의 관습대로 그의 교구장과 독일의 대사 시행을 책임진 고위 성직자에게 항의하는 편지와 대사의 남용을 논박하는 신학명제인 '95개항 명제'를 작성하여 보냄으로써 대사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개신교 기원을 루터의 종교개혁에 두고 있다면 그 시발점은 바로 이 대사논쟁(大赦論爭)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는 사목자로서 설교를 통해 대사 교리와 구원론을 설명하면서 대사 설교가들을 비판, 신자들에게 대사 남용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 영혼은 원죄로 인하여 완전히 부패하여 그 어떤 착한 행위도 우리 의지로 할 수 없으므로 스스로는 의로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功德)이 병풍과도 같이 인간의 죄를 덮어 주는 것이므로 오직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만 있다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고신극기(苦身克己), 종교계율의 엄수, 고해성사, 자선사업, 덕행 등이 구원의 조건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아무런 조건 없이 그리스도의 자비에 대한 신뢰만 필요하며, '우리를 구하는 것은 선행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수한 자비만이 우리를 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성서만으로, 은총만으로, 신앙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고 요약하였다. 
(2) 대사논쟁(大赦論爭)
죄를 범한 죄인은 고해성사를 통하여 죄의 잘못을 용서받고 영원한 벌에서 벗어났지만 자기 죄로 인해 생긴 벌을 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죄의 벌은 고해신부가 부과하는 보속의 실천을 통해서 탕감될 수 있고, 현세에서 보속을 하지 못할 경우 연옥에서 보속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다. 이 보속을 면제해 주는 것을 대사라고 한다. 대사는 교황이나 주교들이 줄 수 있다. 
이러한 대사제도는 초대 교회 박해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 교회의 보속 규정에 의하면 죄인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자신의 죄를 보속하는 속죄기간을 거쳐야 그에 해당하는 벌을 사면받는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박해기간 동안에는 이러한 규정을 지키기가 힘들었고, 후에 신자들이 다시 교회에 들어오는 데 일종의 장애 요소로도 작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특별한 경우에 주교들은 속죄기간을 단축하여 주기도 하였는데, 이 속죄기간의 단축이 대사의 기원을 이룬다. 그후 속죄기간의 단축이 아니라 속죄를 사면하는 관습이 생겨났고, 이는 이른바 대사의 원형이 되었다. 그후 십자군운동이 일어나면서 대사는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나 십자군을 위하여 재산을 기부하는 자에게 주어졌는데, 이 대사는 십자군운동이 끝난 후에도 일정한 공익사업을 위해 기부하는 자에게도 주어졌다.
즉, 이는 중세말 소위 '대사 설교가'라는 사람들이 나타나 대사를 남용하면서 소위 '면죄부(免罪符)'라고 알려진 증서를 발매하기에 이른 것인데, 이것이 바로 루터의 95개항의 '항의명제(抗議命題)'가 나온 원인이다. 1506년 성 베드로 성전을 개축할 때 막대한 돈이 필요했으므로 교황들은 전대사(죄의 벌을 전부 사해주는 것)를 반포하고 신도들에게 재정지원을 청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 대사의 반포가 너무나 자주 있었고, 그외에 대사 선전자들 주변에는 흔히 탐욕이 뒤따랐다. 그들은 이 대사를 기회로 잡아 돈벌이에 이용하였고, 그 폐단이 사람들 사이에서 비난거리가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대사는 교회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오용되어 설교가들은 모금의 성공을 위하여 대사의 효과를 과대하게 설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죄의 용서와 죄벌 사이의 구분이 불투명해졌고 무지한 신자들은 대사와 구원을 혼동하여 대사 부여를 약속하는 고해성사표를 곧 천국 통행증으로 오해하였다. 신자들은 고해성사표에서 강조하는 대사를 얻기 위한 내적 정화를 등한시하여 돈이면 구원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대사 교리가 중세 말기의 지배적인 견해였고 여기에 근거한 대사 시행과 대사 판매의 행위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공식적으로 이러한 과장된 교리를 밝힌 적이 없었다.
이에 교회 안에서는 잘못된 대사 시행에 대해 개혁의 소리가 높았고, 대사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재확인하여 공식적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루터가 대사 교리에 대한 토의를 제기하기 위해 '95개항 명제'를 공표한 사실은 자연스러운 사건이라고 하겠으나 교회 안에서의 개혁이 아니란 사실이 지극히 아쉬운 관점이라 하겠다. 이와같이 루터의 사상과 대사 논쟁은 결국 루터의 파문과 함께 그리스도교 세계가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에서는 독일의 루터 종교개혁을 위시하여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린의 종교개혁과 칼빈의 종교개혁, 그리고 재세례파의 급진적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국교회(성공회)가 탄생하였다. 

8. 가톨릭 교회의 쇄신
가톨릭도 15세기 초부터 교회 쇄신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던 중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자극을 받아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교회 쇄신을 바라는 사람들이 공의회의 개최를 요구함에 따라 1545년 트렌트에서 공의회(1545∼1563년)가 개최되었으니, 여기서 타락한 교회에 대해 반성하면서 신학과 교리를 재정리하고 교회 규율을 혁신하였다.
이 공의회는 종교개혁으로 혼란스러워진 가톨릭 교의를 명백히 하였고 교회 개혁을 추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 공의회 이후에 가톨릭 교회는 교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되면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지방교회와 수도원에서 교회 쇄신이 일어났다. 트렌트 공의회의 개혁정신은 선교활동에서도 나타났는데, 종교개혁 이전까지 유럽의 종교로 머물러 있던 가톨릭 교회는 리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신대륙 탐험을 통해서 세계 선교에 나선다. 그리하여 이제 가톨릭 교회는 동서양에 걸쳐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적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기에 들어서 유럽의 가톨릭 교회는 세계의 여러 나라로부터 정치, 종교, 사상에서 정면으로 도전을 받게 된다. 특히 국교회 사상과 가톨릭 정통 신학을 반대하는 이단 운동인 얀세니즘(Jansenism), 그리고 계몽주의 사상도 가톨릭 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9. 근대교회
18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는 외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켰다. 그 영향을 받은 가톨릭 교회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일부 지역에서 점점 그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세속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과 세속화는 교회가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교황청과 지방교회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고, 이에 교회는 반가톨릭 국가에서 단결하게 되었고 국가지상주의와 국교회 사상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운동, 즉 교황지상주의(敎皇至上主義)가 세력을 넓혀가게 되었다. 이에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상처받은 교황 권위를 회복하였으며 가난해진 교회는 근로대중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반교회적 요소들에 대한 대처방안과 이에 따른 교회법의 개혁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1869년에서 1870년까지 열리게 되었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신앙과 계시의 속성에 대한 헌장과, 이성과 신앙 및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에 대한 헌장을 반포하였다. 레오 13세(1878∼1903년)는 1891년 '가톨릭 사회주의 대헌장' 또는 '새로운 사태'라 불리는 회칙을 반포하여 근로대중을 위한 사회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이 회칙은 널리 유포되기 시작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운동을 어느 정도 저지하고 그리스도교 노동조합을 창설, 발전시키며 가톨릭 정신이 구현되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적 정당을 탄생시켰다. 

10. 현대교회(제2차 바티칸공의회 1962.10∼1965.12)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우선 성직자 중심의 교회체제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지위와 사명이 부각되었으며 '평신도 신학'이 정립되어 성직자와 평신도가 교회에 대해 함께 책임을 지는 그리스도 공동체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20세기 가톨릭의 중요한 사건은 교황 요한23세(1958∼1963년 재위)가 소집하여 교황 바오로6세(1963∼1978년)가 마무리지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이다. 바티칸 성베드로대성전에서 개최된 이 공의회는 화해와 쇄신을 통해 교회가 인류의 복지와 평화와 구원을 촉진시킬 수 있는 교회로 되기 위한 공의회였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급변하는 현대세계에 적응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하는 동시에 다른 그리스도교와의 일치를 위해서 계속 노력하고 있다. 또한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도 폭넓은 대화의 길을 모색, 진행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미래세계를 향한 일치와 희망으로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결론 : 그리스도 교회는 초기 사도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세계 안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고 온 인류에게 희망을 제시하며 생활해 왔다. 이러한 교회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박해와 이단사상, 그리고 분열의 고통과 아픔을 겪으면서도 좌절하거나 후퇴함이 없이 더욱더 성숙되어 하느님의 사명을 실현해 왔다. 이를 통해 교회는, 하느님이야말로 세상과 교회의 역사를 이끄시는 분임을 고백하며 더욱 새롭게 변화된 모습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이웃과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를 위하여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15장  한국천주교회사



1. 시대적 배경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된 18세기 말엽의 조선사회는, 양반사회의 모순이 중첩되어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이 그치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민중의 생활이 도탄에 빠져, 새로운 사회질서를 찾던 변혁기의 왕조사회였다.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적 전통(성리학)은 현실의 여러 모순을 극복하기에는 힘이 부족하였다. 그러던 중 중국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사상과 문물들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이 완고한 현실의 타파를 위한 새로운 운동(실학)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한편 이러한 문명의 흐름을 타고 서구의 그리스도교 사상도 들어오게 되었는데, 당시 중국에 보내진 외교사절단을 통하여 {천주실의}, {칠극} 등의 천주교 교리서가 들어와 실학파들과 남인계 소장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학문적 호기심으로 연구되던 천주학은 천진암과 주어사의 연구모임인 '강학회'를 통해 신앙적 실천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마침내 이벽, 정약용, 권철신, 권일신 등은 천주교에 대한 지식의 폭을 넓히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게 되었다. 

2. 교회의 창립(1784년)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많은 교리서와 성서 그리고 성물을 가지고 귀국한 후 뒤이어 이벽 등이 영세 입교하였고, 서울의 명례방에서 정기적인 종교집회를 마련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면서 한국교회가 탄생되었다. 지금까지 단 한 사람의 전교신부조차 찾아온 일이 없었던 아시아의 한 왕국에 복음을 심기 위해 하느님은 기적적으로 한국교회를 창설하신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 민족 스스로의 깨우침으로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여 신앙의 싹을 틔웠고, 평신도가 주축이 되어 오랜 박해의 기간 동안 신앙을 증거하고 키워 온 자랑스런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3. 박해의 시대
1784년 이승훈의 세례로 출발하여 1886년 한불수호조약(韓佛守護條約)으로 선교의 자유를 획득하기까지 100여 년 동안은 한국교회의 혹독한 박해기요, 더불어 가장 탄탄한 주춧돌을 마련하기 위한 시련기였다. 만민평등사상과 천주사상을 외쳤던 종교적 요인도 있지만, 타락한 세도정치의 희생물이 된 천주교는 조선왕조 말기의 숱한 권력의 변화와 더불어 수많은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최초의 박해는 을사년(1785) 봄, 명례방(현재의 서울 명동)에서 종교집회를 열고 있던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이 추조(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됨으로써 일어났다(을사추조적발사건). 이중 집주인인 김범우는 자신의 믿음을 굽히지 않아 한국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에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살랐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였다(신해박해). 이 박해 이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고, 신도들의 열렬한 전교활동으로 교세가 크게 발전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정부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단행함으로써 1795년에는 윤유일 등이 순교하였다(을묘박해).
이후 1801년의 신유박해는 신생교회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는데 주문모 신부와 '백서'사건의 황사영 등 200여 명의 신도가 순교했다. 그러나 그런 박해 속에서도 살아 남은 신도들은 다시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831년에는 조선교구가 설정되었고, 이에 파리외방선교회의 선교사가 조선에 파견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는 3명의 프랑스인 선교사와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은 정하상 등이 순교하였고, 1846년의 병오박해 때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과 현석문 등 9명의 교우가 순교하였다. 한편, 교구 설정을 전후하여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고자 노력했는데, 박해시대 동안 김대건과 최양업이 신부로 서품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뜨거운 신앙과 뛰어난 학식으로 신도들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며 장렬히 순교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신도들을 위한 봉사와 성직자 양성을 위해 전생애를 바쳤다. 비록 피를 흘리지는 않았지만 그의 생활은 연속되는 순교 그 자체였다. 마지막으로 1866년에 시작된 병인대박해는 근 10년간 계속된 가장 혹독한 시련으로 선교사 9명이 희생되고 남종삼 등 8,000여 명의 신도들이 순교하였다. 

4. 박해시대 교회에 관한 성찰
교회 창설 이후 100여 년에 이르는 박해 기간 동안 10,000여 명의 신도들이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도록 기도하며 죽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시련기를 겪으면서 오히려 한국교회는 뜨거운 신앙과 따뜻한 사랑의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었고, 지금의 우리가 새롭게 되새겨 본받아야 할 몇 가지 교훈을 남겨 주었다.
첫째, 순교 선열들의 뜨거운 신앙심이다. 순교 선열들에게 하느님은 참으로 모든 것이었다. 하느님과 함께 있을 때 모든 것을 얻고, 하느님과 함께 있지 않을 때 모든 것은 허무라는 것을 이분들은 깊이 깨달았다. 때문에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천주교를 믿으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신명을 바쳐 이를 힘차게 증거하였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같이 굳센 믿음이다. 하느님을 진실로 모든 것에 앞서서 믿고 따르고 사랑하는 삶인 것이다.
둘째,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그 어려운 박해 속에서도 서로 사랑하기를 친형제같이 하였다. 이들이 박해의 손길을 피해서 산간벽지로 피난살이를 할 때에는 서로가 어려운 처지이면서도 가진 모든 것을 나누었고,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아래 문초를 받을 때에는 서로 격려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믿음을 굳건히 지키도록 도왔던 것이다. 순교 선열들의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박해자들까지 감동시켜서, 마침내 박해자들 중에서도 회개하고 영세 입교하여 순교한 사람이 있었다.
셋째, 박해시대의 신도들은 천주교를 일종의 사회적 복음으로까지 인식했다. 교리에 내포된 평등사상은, 당시 신분제도를 비롯하여 불평등한 각종 사회질서 아래 신음하던 많은 민중들에게는 새로운 사회복음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양반, 천민이라는 신분제도에서 벗어나 하느님 앞에 모두가 한형제라는 우애를 실천하였다. 또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격을 가진 귀한 존재임을 일깨워 주었으며, 서자와 과부, 어린이 등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권리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수용 당시부터 한글로 성서와 교리서를 옮기는 등 한글을 공용어로 사용함으로써 평등하고 보편적인 민중문화를 형성하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초기 한국 교회 공동체에서 보여주었던 뜨거운 신앙과 형제적 사랑, 그리고 사회 혁신의 정신은 다소 수용되기도 하고 퇴색되기도 하면서 한국천주교회의 뿌리가 되었다. 

5. 종교의 자유와 발전: 1886년 한불수호조약
19세기 후반, 잇달아 체결된 구미 열강(歐美 列强)들과의 불평등 조약의 와중에서, 1886년 프랑스와 맺은 한불수호조약은 불완전하게나마 조선에 처음으로 선교의 자유를 가져왔다. 이리하여 박해시대에 형성된 교우촌과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본당 조직이 발전하게 되었다. 서울의 명동에 주교좌 본당이 건립되고,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서울 용산에 세워졌으며, 여러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하여 교회사업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북간도에도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교회를 세우니, 현재도 북간도 지방은 한국교회의 관할권 밑에 속해 있다. 또한 교회는 교육운동과 언론운동을 전개해 1910년까지 124개의 학교를 설립하였고, 경향신문을 창간하여 백성들에게 바른 판단을 제공하고, 열강의 다툼 속에서 민족 독립을 수호하고자 노력하였다.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안중근의 의병활동, 서상돈의 국채보상운동은 우리의 민족기개를 높이 드날린 것이었고, 3·1운동과 광주학생의거에 대거 참여하여 굴욕과 인내의 시기를 극복코자 했던 것도 선각자적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6. 교회의 발전과 사명
일제의 탄압에도 교회는 꾸준히 발전하여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을 성대히 거행했고, 교구 조직이 크게 발전하여 9개 교구로 증가하였다. 1942년에 노기남 신부의 주교 서품으로 서울 교구장직이 처음으로 한국인에게 넘겨졌다. 8·15 해방은 교회에도 큰 감격과 기쁨을 안겨 주었다. 우리말로 미사를 드리고 성가를 목청껏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38도선 이북의 교회는 남쪽과는 달리 대규모 탄압과 성직자 체포로 신앙의 자유를 잃게 되어 국토 분단의 비극은 북한교회의 전멸을 가져왔으며 오늘날까지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 6.25 사변 중에는 교회를 복구하고 이재민에 대한 구호활동을 통하여 교회의 사업을 계속해 나갔으며, 전후에는 전쟁과 부패한 정치로 인한 피해와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과업을 떠맡게 되었다. 1953년에 도입된 레지오마리애운동은 평신도들의 신심과 활동을 성장시켰으며, 신용협동조합운동으로 신도들의 자립심을 키워주고,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설립하여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1962년, 한국교회는 명실공히 독립된 정식교구로 승격되었으며 이 해에 시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교회의 반성과 쇄신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고, 한국교회도 스스로의 쇄신을 위해 노력해 오고 있다.
1984년 한국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아 103위 순교복자들이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고, 1989년에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유치한 한국교회는 이제 새로운 도상에 서 있다. 1996년 말 현재 15개 교구(북한의 2개 교구 제외)에 356만 신자(남한 인구의 약 7.8%), 2,600여 명의 성직자가 활동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성장과 발전의 미명 아래 반복음적 삶을 사는 수많은 '가난한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광명과 해방을 알리는 시대적 요청에 직면해 있다. 초창기 순교 선열들이 피로써 증거한 그 뜨거운 열심을 회복하여 외적 성장에 맞는 내적 성숙을 이룩해야 한다. 그리하여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가 함께 주역으로 뛰어야 할 내일은 바로 우리의 교회사인 것이다. 

한국천주교회 주요 박해 
박 해 사 건
결 과
1
을사추조적발사건(정조9년, 1785년)
이벽의 가택 감금과,김범우 유배생활, 그 여파로 사망
2
신해박해(정조15년, 1791년)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3
신유박해(순조1년, 1801년)
주문모 신부, 정약종 등
초대 교회지도자 순교
4
을해박해(순조15년, 1815년)
경상도 교우 100여 명 체포, 그중 30여 명 순교
5
정해박해(순조27년, 1827년)
전라도 교우 240여 명을 포함하여 경상도, 충청도, 서울 등지에서 500여명 체포됨.
그중 15명이 옥사 혹은 순교
6
기해박해(헌종5년, 1839년)
전국적 박해. 정하상 등 불란서 성직자 3명을 합하여 100여 명 순교
7
병오박해(헌종12년, 1846년)
김대건 신부 등 10여 명 순교
8
병인박해(고종3년, 1866년)
대원군에 의해 8천∼2만여 명 순교
9
제주교난(고종3년 1901년)
일반민중에 의한 천주교도 학살

 제 6편
16장  하느님의 어머니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요점정리> 
▨ 하느님은 마리아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가?하느님은 마리아에게 은총을 가득히 주시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고 하늘에 오르게 하셨다. 
▨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은 무엇인가?예수는 마리아의 태중에 임신되기 이전부터 하느님이셨고, 출생 이후에도 하느님이시다는 것을 뜻한다. 즉 마리아는 하느님이신 분을 낳으신 것이다. 
▨ 동정녀에게서 예수님이 나셨다는 뜻은 무엇인가?예수는 인간의 부부생활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성령의 힘으로 예수를 임신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은 무엇을 뜻하는가?마리아는 성령의 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낳았고, 그후에도 하느님의 은총을 언제나 보존하였음을 뜻한다. 
▨ 마리아의 원죄 없이 태어났음과 하늘에 올림을 받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모든 인간이 원죄에 물들은 채 태어나지만, 마리아는 하느님이신 예수를 임신할 몸이므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으며, 이러한 특별한 은총에 힘입어 죽은 후에도 그 육신은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 나라로 들어올려졌음을 뜻한다.

1. 성서 안의 마리아
우리가 마리아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마리아 자신 때문이라기 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고 그분의 아들이 세상 모든 것을 바꿔 놓으시기 때문이다. 신약성서가 마리아에 관해서 길게 말하는 것은 아니나,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의 마리아의 위치에 관한 기본적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던 초대교회 신자들의 관심은 그분의 수난, 죽음, 부활에 있었으나 점차 예수의 생애 전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관심도 커져 갔다. 마리아에 관한 가장 충분한 언급은 신약성서 중에서도 루가 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온다. 루가 복음의 앞 머리에 있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는 마리아가 중심인물이다. 또한 우리는 사도행전의 첫 머리에서 마리아가 이층방에서 사도들과 계속 기도하시는 것을 본다. 성 요한도 예수님의 공생활에 관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마리아가 아주 뚜렷이 드러나시는 두 장면, 즉 가나와 골고타의 장면으로 꾸민다(요한 2,1-12; 19,25-27). 
성 마태오는 예수님의 탄생을 모세의 전통과 약속에 비추어 사색하면서,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채워졌다는 것을 말한다. 성 마태오의 메시지 요점은, 인간 어머니에게서 나신 예수님이 구원의 하느님의 새로운 현존을 백성들에게 가져온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이다. 
성 루가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지위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좀더 깊이 보게 한다. 그의 신학적 목표는 예수님을 신적 메시아와 주님으로 묘사하는 것이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한다(루가 1,26-38)는 성모에 관한 중심 계시이다.
마리아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 혹 '총애를 받은 이'라고 불리운 것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마리아의 역할이 특유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구세주의 어머니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 결과로 '은총을 가득히 받았다'고 루가는 알려준다. 주님이 마리아 안에 계시고, 마리아가 총애를 받으시므로, 마리아는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다"(루가 1,42). 성전에서 한 시므온의 예언은 마리아를 메시아의 수난과 이어 주고 있다(루가 2,25-35).
요한 복음은 마리아에 관해서 단지 두 번만, 한 번은 주님의 공생활 시초에, 또 한 번은 십자가 밑에서 말하지만 신앙이 두터운 이 여인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려 준다. 우선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요한 2,4)에서 당신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면서 또 갈바리아의 십자가 위에서도(요한 19,26) 사용하신 '여인'이란 호칭은 예수님의 구속 사명과 마리아의 역할이 독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복음은 마리아가 제일 처음으로 기적을 요청하였다고 하는 사실(요한 2,1-11)로 보아, 마리아의 신앙이 예수님의 측근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갈바리아의 장면에서 예수님이 당신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라고 하신 말씀은 마리아가 모든 신자의 영성적 어머니이심을 상징적으로 지적하는 것이다. 

2.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마리아에 대한 성서 기록에 맞추어, 사도시대 직후의 신자 들이 믿은 것은 마리아의 모성에 관한 것이었다. 테오토코스(theotokos:'하느님을 낳은 자',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명칭을 맨 먼저 사용한 사람은 3세기 초 로마에 살았던 성 히뽈리또였다.
그리스도에 관한 전통적 가르침은 말씀이 즉, 성삼위의 제 2위이신 성자로 마리아의 태중에 임신되는 첫 순간부터 육화(肉化)하였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임신하여 낳은 여인이 바로 그 사람의 어머니인 것처럼 마리아도 진정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마리아에게서 인간 육체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천상 성부께 영원히 낳음을 받은 것이지만, 강생을 통해서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임신하고 낳았다. 그래서 마리아는 진정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시다. 

3.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예수님의 어릴 때의 이야기는 그리스도가 성령의 힘에 의하여 임신되었고, 성령은 인간 아버지의 관여함이 없이 마리아를 '감싸 주었다'는 믿음을 분명히 전달하고 있다. 마리아에 관한 모든 교리가 그러하듯이 마리아의 동정성에 관해서도 마리아는 하느님을 낳은 자라는 그리스도론에 비추어 사색해야 한다.
마리아가 오로지 성령의 힘을 통해서만 그리스도를 임신하였다는 것이 가톨릭 신앙의 교리이다. 교회는 또한 마리아가 동정녀로 남아 있으면서 예수님을 낳으셨다고 선포한다.
마리아가 당신 전 생애를 통해서 동정녀로 계셨다는 진리 또한 신앙의 교리이다.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중대한 한 부분이란 것이다. 우리가 이 점을 보지 못할 때 마리아의 동정성의 의미도 찾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 교리를 순수한 영성적 상징이나 신화로 해석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대한 역사적 차원을 인식 못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사건들의 영성적 의미를 음미하려고 노력한다. 동정녀로서 하느님을 낳으신 것은 강생을 통해서 하느님이 참으로 세상으로 들어오신 것을 증언하는 동시에 하느님이 예수님의 아버지시라는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낸다.
마리아의 동정성에는 또한 교회적 의미와 종말론적 의미도 있다. 교회는 동정녀 어머니로서, 말씀과 성사를 집행함으로써 그리스도 형제 자매를 낳는다고 비유할 수 있다. 또한 마리아는 사제나 수도자의 순결의 모범이시다. 

4. 원죄 없이 임신되시고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마리아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로 예정되었으므로, 하느님은 미리 손을 써서 마리아가 말씀의 어머니가 되도록 자격을 갖추게 하셨다. 마리아가 받은 특유한 은총과 특권은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 안에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따라서 마리아는 우리 각자가 제한된 한도 내에서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도달해야 할 것을 가장 잘 표시해 준다. 마리아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는 데 있어 신앙, 희망, 사랑으로 성장하도록 기도하신다. 우리의 경우에는 세례의 은총이 우리의 '원죄없는 임신'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삶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도 또한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의 '동정녀 모성'에 참여할 수 있다. 
마리아는 "구속의 가장 훌륭한 열매이다"(전례헌장 10,3). 이 가르침은 마리아의 무죄함에 대한 절정적 표현이다. 마리아는 죄 많은 인류에 속하는 아담의 한 후손이므로 의당히 원죄의 죄과를 받았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특별한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로 말미암아 마리아를 원죄에 물들지 않게 하였다는 것이다. 교황 비오9세는 마리아의 원죄없는 임신은 계시진리라고, 1854년에 정식으로 정의하고 공포하였다.

17장  교회의 어머니요 모범이신 마리아



1.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가톨릭 신심은 마리아께 '교회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드린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또한 예수님의 구속사업에 특별하게 관련되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 구속사업이 교회 안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 칭호를 받으신다.
세례 때에 우리는 구속의 은혜를 받는다. 그런데 마리아는 임신의 순간에 이 은혜를 받으신 것이다. 이렇게 마리아는 독특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은총을 받으셨기 때문에 개인의 죄와 사악한 성향이 전혀 없는 일생을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 주신 풍성한 은혜만큼 은총에 대한 마리아의 협력과 호응도 완전하였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구속의 첫 열매가 되시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구속의 결실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마리아는 당신 아드님의 수난과 죽음을 앞에 놓고 괴로워 하였지만, 동정 깊은 사랑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바로 이것 때문에 마리아는 구세주의 모친이자 우리의 모친이 되셨다.
예수님의 고난에 마리아처럼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도행전을 보면 아드님이 승천하신 후 마리아는 사도들과 한자리에 모여 기도를 올리셨다(사도 1,14). 또 어머니다운 마리아의 활동은 어린 교회로 하여금 복음을 곳곳에 설교할 사명을 좀더 깊이 깨닫게 하였다. 또 마리아는 복음서가 만들어지는 데도 상당한 역할을 하셨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을 나눠 주는 데 특별히 협력하셨기 때문에, 마리아는 우리 영성상의 어머니이시다. 이 역할은 우리 구세주이시요 신비체의 머리이신 주님의 친어머니 되심에서 유래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성 아우구스띠누스의 다음 글귀를 빌어 쓰고 있다. 마리아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어머니이시다 … 왜냐하면 마리아는 신자들이 교회 안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태어나도록 사랑으로써 협력하셨기 때문이다." "순명과 믿음과 희망과 불타는 사랑으로 영혼들의 초자연적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온전히 독자적인 방법으로 구세주의 구속 사업을 도와 드리셨다. 이 때문에 은총의 세계에서 우리의 모친이 되시었다"(교회헌장 61). 

2. 중재자이신 마리아
교회에서 성모님께 드리는 호칭의 하나가 '중재자'이다(교회헌장 62). 그러나 이 호칭은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위치와 효능에 아무런 변동을 가져오지 않는다(교회헌장 62). 어머니로서 구세주의 구속사업에 참석하셨고, 그분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신 만큼 만민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려는 구세주의 뜻에 중재자로서 참여하신다.
마리아의 중재 역할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직접 결합을 도와 주는 것이다. 마리아는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길이므로, 마리아를 만나뵙는 이는 자연히 그리스도를 만나뵐 수 있다. 마리아의 역할을 잘못 이해한 데서 가톨릭 신자와 다른 그리스도인들 간에 상당한 오해가 생겨났다.
마리아는 항상 당신 아드님 곁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 현세에서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듯 이 천국에 있는 우리 형제 자매들도 우리를 위해 전구한다. 그 중에서 마리아의 중재 능력은 각별하고도 가장 효험이 크다.
가톨릭 신심은 '우리를 위해 빌어 줄 것'을 성인들에게 '기도한다'(제3감사기도). 그렇다고 성인들을 하느님처럼 생각하고 기도의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니다. 마리아를 위시해서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우리도 그들처럼 하느님을 언제나 사랑하여 받들도록 붙들어 주십사 하는 내용이다. 

3. 마리아 공경(성모신심)
교회에서 신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늘 마리아께 공경을 드리고 끊임없이 사랑을 바쳐왔다. 마리아 공경은 물론 하느님께만 드리는 "흠숭(欽崇)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교회헌장 66).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시므로 고귀한 품위를 가지시나 역시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시다. 그러므로 마리아 신심에는 과장도 경시도 없어야 한다. 개인적인 마리아 신심은 교회 전례를 따르는 것이 좋다. 성모 공경은 그이의 아드님을 더욱 사랑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 또 '삼종기도'나 '묵주 기도'처럼 교회에서 매우 존중되고 권장되어 온 전통 깊은 개인 기도도 신앙의 교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 

4. 교회의 전형(典型)이신 마리아
마리아는 교회의 한 지체이심에 틀림없다. 그러나 마리아는 교회 공동체에서 특별한 역할을 차지하신다. 그리스도교적 덕행의 탁월한 모범으로 교회의 '전형'이 되신다. 신앙과 사랑과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에 있어서 하느님의 모친은 교회의 전형이다(교회헌장 63).
마리아는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협조하는 사명을 띠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형이 되신다. 당신 아드님을 도와서 타락한 인류를 구원에로 인도한 마리아의 업적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명을 충실히 계속하는 데 크나큰 모범이 되는 것이다. 교황, 주교, 사제와 부제, 수도자와 평신도는 구원을 전달하는 소명에 있어서 마리아를 모범으로 모실 수가 있는 것이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열어 놓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늘 교훈이 되어 왔다. 마리아의 깊은 신앙생활, 겸손한 순종, 항구한 희망, 순결, 마음의 가난, 용기있는 사랑은 각 신자에게 모범이 되신다. 부부와 부모들은 요셉과 예수님에게 바친 마리아의 사심없는 사랑에서 빛과 영감을 얻을 것이다. 독신 사제와 수도자는 마리아가 동정의 몸으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봉사하셨다는 사실과, 마리아의 기도정신과 헌신적 봉사에서 깨달음과 영감을 받을 것이다. 

5. 성모승천
지상생활을 끝내고 마리아는 아드님께로 돌아가셨다. 몸과 영혼을 그대로 가지시고 하늘로 올림을 받으셨다. 성모승천에 관해 성서가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 교리는 마리아의 성덕과 품위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과 인간의 목적, 죄, 죽음, 육신의 부활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에 근거를 두고 있다. 죄에 물든 일이 없는 몸이셨기에 당신 아드님처럼 그의 몸도 무덤에 계시면서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을 낳아 주신 분이 육체를 갖고 하늘에 오르시어, 부활한 영광의 몸을 가지신 예수님을 흠숭하고 계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승천하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은 여러 세기에 걸쳐 믿음과 신심이 전승되어 오다가 1950년 11월 1일에 교황 비오12세는 성모승천의 교리를 정식으로 정의하고 선포하였다. 성모승천은 우리도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완전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는 희망의 표지가 되는 것이다. 

6. 예수의 양부 성 요셉
성가정의 기둥이요 성모의 배필이자 우리 구세주의 양부이신 요셉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가장 고귀한 소명 중의 하나를 받으신 것이다. 마리아처럼 성인도 하느님의 계시 말씀에 자기 마음을 온전히 열고 있었다.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임신하자, 요셉은 당황하고 괴로와했다. 그렇지만 그는 성서의 말씀대로 "법대로 사는 사람"(마태 1,19)답게 행동했다. 요셉은 마리아와 혼인하였다. 서로 동정을 지키기로 한 결혼이었지만 헌신적인 사랑의 결혼이었다. 요셉 성인이 예수님의 친아버지가 아님은 사실이지만 요셉의 정성과 사랑 가운데 동정 마리아의 아드님이 태어났으며,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기도 했다. 1870년 12월 8일 교황 비오9세는 성 요셉을 '전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성인의 각별한 정의감과 성실성은 아버지와 근로자들이 특히 본받아야 할 것이다. 


18장  갈라진 신앙세계



1. 하나의 뿌리
유대교는 구세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구약성서는 하느님께서 특별히 유대 민족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당신을 나타내 보이신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교 성서(구약성서)는 가톨릭 성서에도 들어 있다. 교회가 구약의 계시를 받은 것은 하느님의 선민을 통해서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아브라함이 받은 소명을 함께 받은 사람이며, '아브라함의 후손들'(갈라 3,7)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양측의 위대한 공동유산을 상기시키며, "성서 및 신학의 연구와 형제적 대화와 존경을 권장한다"(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4). 

2.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우리 형제들
가톨릭 교회는 하나이자 유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굳게 믿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가치가 없다거나 불성실하다거나 그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깊이 귀의(歸依)하고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이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거룩한 특징을 간직해 오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눈에 보이며, 살아 있는 이 교회 안에서 신앙의 일치와 사랑의 친교를 이룩하도록 만인을 부르고 계신다는 말이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교회는 크게 세 교회, 즉 가톨릭교회, 동방교회, 개신교가 있다. 

(1) 동방교회
동방교회는 동유럽과 중동지방에 퍼져있는 그리스도교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정확히는 '동방교회들'이라고 불러야 한다.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과 신학을 가지고 있는 이 여러 교회를, 우리는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과 구별하여 동방교회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약 1억 5천만 명의 신자를 가진 동방교회는 크게 그리스 정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뉜다. 그리스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에 있는 총주교를 중심으로 20개 교회로 이루어져 있는데, 러시아 교회, 루마니아 교회, 불가리아 교회, 그리스 교회, 북미 교회, 콘스탄티노플 교회, 조오지어 교회, 사이프러스 교회, 세르비아 교회가 두드러진다. 각 나라의 동방 주교들은 총주교를 중심으로 뭉쳐있고, 이 총주교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를 중심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동방교회 안에서도 그리스 정교회와 구별되는 다른 동방교회들은 콥트 교회(에집트), 시리아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터어키 북동부와 옛 소련 남부 아르메니아 공화국), 에디오피아 교회, 인도 교회(인도 남부)로 나뉘어 있다.
동방교회의 전례를 지키고 있으면서도 로마교회와 일치하는 교회들도 있는데, 이들은 자기네 지역의 동방교회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면서도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한다.
이들 동방교회 신자들도 자신들이(로마 가톨릭과는 구별되는)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한다. 1054년 동방교회와 로마교회가 서로 단죄하고 분열하게 되었으나, 1965년에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와 바울로6세 교황이 만나 서로 화해하고 단죄를 철회함으로써, 넓은 의미의 일치가 회복되었다.
동방교회 신자들은 로마 교황을 로마교회의 주교로는 인정하나, 그의 수위권과 무류권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2) 개신교
1517년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마침내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으니, 이로써 많은 개신교(프로테스탄트)가 나오게 되었다.
①루터교
루터(1483∼1546)의 신학 노선을 받아들인 루터 교회는 많은 점에 있어 가톨릭과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성체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심을 믿으며, 성서를 결정적인 최종규범으로 여긴다. 믿음만이 구원을 가져다 주며, 인간의 선행은 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여긴다.
②장로교
스위스의 칼빈(1509∼1564)의 신학에 기반을 둔 교회로서, 예정설을 믿으며 엄격한 도덕주의를 강조하고, 정치적·경제적 문제에 집념을 가지고 있다. 성서 봉독, 설교, 자율기도, 찬송가, 시편성가를 중시한다.
③침례교
이들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성인세례만을 인정한다. 성서를 중심으로 삼으며, 신학적으로는 일반적으로 보수적 경향이다. 성직계급이 없으며, 모든 신자들의 사제직을 인정한다.
④성공회
영국의 헨리8세가 자신의 이혼을 합법화하기 위해 16세기에 로마와 단절하고 영국식의 교회를 세웠다. 영국 캔터베리의 주교를 으뜸주교로 인정하는 성공회의 전례는 가톨릭과 유사하지만, 신부, 주교는 결혼할 수 있다.
⑤오순절교회
성서에 중심을 두면서 성령의 활동을 강조하고, 갑작스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성령의 세례를 강조하는 가운데 방언의 은사를 중요시한다. 세상 고통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적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치적, 경제적 차원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많은 가난한 나라의 정치가들, 기업가들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3) 세계교회협의회(WCC)
194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설립되었으며, 전세계 개신교 형제들의 300여 개 교회를 회원으로 두고 있다. 각 나라에 지부가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한국교회협의회(KNCC)가 있다. 현재 가톨릭 교회는 이 기구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다. 

3. 교회일치운동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일치운동, 곧 그리스도인들간의 일치를 증진하는 데에 한 몫을 맡도록 부름을 받는다. 과거 수백 년 동안에 걸친 분열은 모두가 양측의 잘못에 기인한다는 점을 깨닫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황 바울로6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한 연설에서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 자행된 잘못에 대하여 하느님과 갈려나간 형제들 앞에 용서를 청하고, 마음으로부터 잘못을 표명함으로써 본을 보여 주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갈라진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교회문제에 관해서 그들과 친교를 가지며, 먼저 그들에게 접근함으로써 관심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첫째가는 의무는 사도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남겨 주신 것들을 가톨릭 신자들이 보다 성실하고 확실하게 실천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4).
한편 가톨릭 신자들은 "갈라진 형제들에게서 발견되는 참된 그리스도교적 보화를 인정하고 그것을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일치 4). 일치운동을 실천한다고 해서 가톨릭의 정체(正體)를 감추거나 진리를 매장하라는 것은 아니다. 일치를 위한 대화에서 교리는 전체적으로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4. 비그리스도교
회교도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보존한다고 주장하며 마지막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신 유일신을 우리와 함께 섬기고 있다"(교회헌장 16). 회교 신앙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예언자로는 공경하며, 동정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기도 한다. 회교도들은 "윤리생활을 존중하며 특히 기도로써 또 자선과 재계로써 하느님을 섬긴다"(비그리스도교 3).
힌두교, 불교를 포함한 많은 비그리스도교적 종교들은 여러 면에서 가톨릭 교회와 다르다. 가톨릭 교회는 이들 비그리스도교적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 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생활과 행동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계율과 교리도 거짓없는 존경으로 살펴 본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면에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비그리스도교 2). 

5. 무신론
교회는 무신론을 단호히 배격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대화는 시도해야 한다. 나아가서 교회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올바르게 건설하는 데에 다 함께 노력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이 일은 '성실하고 현명한 대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사목헌장 21). 

6. 선교하는 교회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선교 2). 세상에는 복음의 소식을 전혀 혹은 거의 듣지 못한 사람이 많아, 해야 할 "선교 사업은 아직도 막대하다"(선교 10). "교회는 복음을 전파할 필요성과 성스러운 의무를 함께 갖는 것이며(1고린 9,16), 이로 인해 선교활동은 항상 변함없이 오늘도 그 힘과 필요성을 분명히 갖고 있다"(선교 7).
하느님은 당신을 섬기도록 사람들을 부르시지만 강요하지는 않으신다. "가톨릭 교리의 가장 중요한 교의의 하나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신앙을 통한 응답은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누구도 자기 의지를 거슬러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해서는 안된다. 이 교리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 포함되어 있고, 교부들로부터 항시 설교되었다. 신앙행위는 그 성질상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다"(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10). 


19장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신다



<요점정리>
▨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생명이 되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그리스도는 당신의 말씀과 행적으로써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스승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에게서 인생의 길잡이, 모범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살고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이 새 생명은 인간의 심원한 동경과 염원을 채워 주고도 남는다. 그리고 인간 생명에서 좋은 점들을 더 좋고 부유하게 만든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신 것은 당신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르실 사람들이 성삼위의 내면의 생명이라고 할 사랑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 새 생명은 은총이며 하느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인간은 받을 권리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미리 뽑으시고, 사전에 그럴 만한 가치가 우리에게 없는데도 생명을 주신다. 하느님이 우리에 관해서 무엇을 '미리 정하셨다'고 해서, 우리를 꼭둑각시나 로봇처럼 부리신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자유로운 인격체로 생각하여 부르시고, 사랑과 우애로써 자유롭게 응답하도록 기대하신다. 누구를 강제로 생명으로 부르시는 일은 결코 없으시다. 또 누가 멸망하기를 바라셔서 당신의 호의에서 따돌리시는 일도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생명'이 되신다. 그분은 인생의 스승이요, 인생의 모범이시다. 그분의 말씀과 행적에서 사람들은 가장 멋지게 인생을 사는 길잡이와 모범을 발견한다. 그 뿐 아니라 우리는 그 분을 통해서 살고 그분에게서 목숨을 받아 살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령을 선물받아 그분과 한몸이 된다. 성령을 모신다는 것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어느 정도 하느님의 참 사랑을 갖는다는 뜻으로, 이 선물들이 사람을 바꾸어 놓는다.
이 새로운 생명은 인간을 치유하고 인간을 들어 높여 신적 생명에 참여케 만든다. 인간의 순수함은 죄로 상처를 입었다. 예수님이 가져다주시는 새 생명을 받아 치유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인간성을 통해서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선물은 온전한 인간성의 회복, 그 이상의 일을 한다.
이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1요한 3,2), 현세에서부터 벌써 하느님의 도리로 살아가라고 부름을 받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 하느님의 지식을 나누어 받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어 하느님의 내밀한 생명을 나누어 받으라는 부르심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은 죄악이 만들어낸 깊은 상처를 없애 주고 더욱 인간답게 만들어 준다. 
성 바울로도 그리스도의 자비와 성령의 선물을 받아 누리기 전에 인간의 무력함에 대한 쓰디쓴 맛을 본 사람이었다(로마 7,14-15.18-19). 아우구스띠누스 성인도 회심 직전에 갈등을 겪었다고 술회하였다. 인간은 자기 힘과 지혜만 믿고 악을 극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면서도, 항상 한계에 부딪힌다.
선을 실천하는 힘!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사람을 해방시키고 자유를 준다. 전에는 하지 못하던 선한 일과 구원을 주는 행동을 할 능력이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새 생명에 이르고, 그것을 키우고, 외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중요한 길은 그리스도의 성사에 참여함과 기도와 사랑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다. 세례로 우리는 새로 태어난다. 그리스도는 세례와 그 밖의 온갖 성사를 친히 집행하신다.
성사는 주님이 당신을 섬기는 봉사자들을 통해서 하시는 주님의 행동, 주님의 구원행위이다. 그러면서도 받는 이의 준비에 따라 결실이 맺어진다. 성사는 신앙과 사랑을 심어 주고 키워 준다. 그리스도께서 이 신앙과 사랑을 자라게 하시지만, 믿음과 사랑은 우리 각자의 자유로운 응답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은총의 신비들 가운데 하나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 필요불가결한 부분이다. 예수님은 기도의 중요성을 손수 가르치셨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영위하고 거기서 완성을 찾는 근본 방법이 기도이다.
신자에게 주어진 생명은 마땅히 자라나야 한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고자 애쓰는 노력은 우리가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뵙는 날 완전한 실현을 볼 것이다. 우리 힘만으로는 하느님과 끝없이 사는 생명을 얻을 생각도 못하고, 우리의 역량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바라는 온갖 선을 우리 대신 얻어 주시는 분이시다.

 제 7편
20장  인간 생활과 하느님의 계획


1. 사람의 삶과 윤리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나는 지금 어떤 선행을 할 것인가? 어느 정도까지, 누구를 위해, 누구와 함께 선행을 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는 도덕 문제와 직결되는 것들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에 부딪치게 되고 생활 안에서 서로 나누는 가운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간다.
사람은 하느님의 진·선·미의 모습을 지녔기에 늘 진리와 아름다움으로 서로를 선하게 가꾸도록 부추겨진다.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에 당신의 사랑을 '진리'라는 소리로 심어 주셨기에 우리 안에는 양심의 소리를 따르라는 손짓이 늘 함께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보다 나은 삶과 온전한 선과 완전한 행복을 원하고 있다. 
무엇이 가치있고 정당하고 옳은지 분별하는 판단을 '양심의 판단'이라고 한다. 왜 가치있는 것을 행하여야 하는가? 양심의 소리에 순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리를 찾고, 이치에 따라 살고, 친교를 맺고 싶어하는 자발적 경향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생과 인간 행동을 두고 일어나는 이 수많은 의문에 하느님이 해답을 주셨다. 해답은 그리스도에게 있다.

2.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그의 정신을 따름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를 부르실 때에 그분은 진리를 찾으려는 우리의 마음에 호소하신다. 이 호소에 따를 때 힘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 그분을 본받도록 격려해 주신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신앙'에로의 부르심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우리의 지성과 모든 재능을 다하여, 당신 아버지의 바라심과 당신이 사람이 되신 목적을 깨달아 신앙생활을 키워가라는 부르심이다. 이것은 '사랑'에로의 부르심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은 곧 성부의 뜻을 따르는 길이다. 하느님의 눈길로 사물을 볼 때 바로 보게 된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그 계획을 따르기로 할 그 때에만 우리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다. 보람있고 바르고 도덕적으로 선한 길은 하나밖에 없으니 곧 하느님이 보시는 대로 보고, 하느님이 판단하시는 대로 판단하고,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사랑하는 길이다. 이것은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3. 양심
양심은 하느님의 소리이다. 하느님은 예외없이 모든 인간에게 양심을 통하여 당신의 기본 법칙을 알려 주신다. 즉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며, 하느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신다. 인간의 깊은 내면에는 불변의 기본 윤리 법칙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누가 악을 저질렀을 때는 본 사람이 없어도 그는 마음으로 괴로워하며 선행을 했을 때는 본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하고 기쁨을 느낀다. 이와 같이 선과 악에 대한 느낌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따라서 양심의 명령에 의해 행동하는 사람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하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 이것 역시 양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다.

4. 잘못된 양심과 바른 양심
하느님이 인간 이성을 통해 말씀하시지만 인간의 이성은 때때로 흐려지기도 하고 그르치는 수도 있다. 따라서 양심은 가끔 애매하게 되고 또는 습관과 환경에 따라 마비되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바른 양심을 가지도록 윤리와 도덕을 위한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 양심의 소리를 보다 확실히 듣도록 하시기 위해 구약시대에 이미 십계명을 가르치셨고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사랑의 규범을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신앙과 은총으로 비추어진 양심을 통해서 이러한 하느님의 소리를 명백히 듣는다. 신앙과 은총과 양심에 의한 권고만은 항상 확실하며 그르침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신앙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은총을 통한 양심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할 때 하느님과 가까와질 뿐 아니라 참된 행복과 기쁨 안에서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5. 자연법 

<요점정리> 
▨ 자연법이란 무엇인가?인간 생활과 인간의 행위에 관련된 하느님의 계획으로서,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기본 윤리 원칙들이다.
자연법은 인간 생활 및 행위에 관련된 하느님의 '계획'을 의미하며, 현세생활에서 인간 정신이 이 계획을 파악하고, 하느님과 합심하여 이 계획에 따라 인간 생활을 영위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자유 4).
교회가 '자연법'에 대해서 말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첫째 '자연법'이란 기본 윤리 원칙들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독단으로 내리신 외적 명령이 아님을 강조한다. 기본 윤리 원칙은 우리의 본바탕이다. 올바른 양심만 있으면 식별할 수 있는 하느님의 법은 주인이 하인에게 내리는 명령이 아니다. 교회가 '자연법'이라는 용어를 쓰는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가르치는 윤리 원칙들이 만인에게, 모든 시대와 장소, 모든 문화와 상황에 적용되는 원리들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인간이 자연법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도 보통으로는 계시를 통해서, 특히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을 통해서만 된다는 것이 교회의 변함없는 입장이다. 

6. 십계명 
<요점정리> 
▨ 십계명은 무엇인가?십계명은 하느님께서 옛적에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반포하신, 윤리의 기본 원칙인 열 가지 지킬 도리이다. 
▨ 십계명의 본 뜻은 무엇인가?십계명의 뜻은,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영성과 모든 힘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으로서, 십계명 가운데 첫 세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관한 것이요, 나머지 일곱 계명은 사람을 사랑하는 데 관한 것이다.
계명은 사랑하는 법을 위해 주어진 규범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인간이 보다 행복하고 즐겁고 화목하게 살아가도록 사랑의 규범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계명은 인간을 속박하는 멍에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옛 계약에 나오는 십계명에 그것이 요약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새 법에 의해서 명확하게 밝혀진다.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도덕 명령이 구약성서의 두 곳, 출애굽기(20,2-17)와 신명기(5,6-22)에 나온다(출애 34장 참조). 요약하면 십계명은 다음과 같다. 
1. 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2.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라.
3.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4.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5. 사람을 죽이지 말아라.
6. 간음하지 말아라.
7.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8.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
9.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아라.
10.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아라. 
이 십계명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첫째, 하느님께 대한 애정 깊은 봉사가 절대 우선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하느님은 당신을 섬기려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이웃을 조건 없이 존경하라고 가르치신다. 사람은 부모, 생명, 성관계, 소유권, 사람들에 관한 진실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셋째, 끝의 두 계명에 나오듯이 어떤 행위를 하겠다는 의향까지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존중에 대립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십계명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계명 전부와 그 부분들을 재천명하셨다(마태 19,17-19). 하느님 사랑에 관한 신명기의 요약문도 재천명하셨고(마태 22,37-38),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머지 일곱 계명을 요약한 것이라고 덧붙여 말씀하셨다(마태 22,39). 이웃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레위 19,18). 사랑의 계명에 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기준이다. 그리스도 자신을 기준으로 세우신 것이다. 이 기준은 극치에 이른 인간 사랑을 요구하며, 인간적 사랑을 신적인 사랑으로 변화시킨다. 

7. 그리스도의 덕 

<요점정리> 
▨ 덕은 무엇인가?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로 태어나 은총에 힘입어 얻은 새 생활방식으로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마음의 건강함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자연법을 능가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넣으시고, 우리를 하느님의 양자가 되게 한다.
은총으로 새로난 사람의 새 생활방법을 '덕'(德)이라고 부른다. 덕은 하느님의 사랑에 힘입어 어떠한 상황에서도 선을 행하여 도덕적으로 바르게 행동하게 한다.

8. 대신덕(對神德

<요점정리> 
▨ 대신덕은 몇 가지 있는가?대신덕은 세 가지 있으니, 곧 믿음, 희망, 사랑이다.
인간 천성에서 오는 덕이 그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 충만한 친교를 이루고 살자면 그 덕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없이도 우리 마음 속에서 일하시는' 하느님께서 그 덕들을 완전한 것으로 만드시고 새 방향을 주신다. 이렇게 승화된 덕을 신학자들은 '천부덕(天賦德)'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성령에 의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 넣어 주셨다는 뜻이다(로마 5,5).
하느님은 의화된 사람에게 성화 은총과 더불어 믿음, 희망, 사랑의 덕을 주시어, 그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 후에 하느님의 사업을 이행하도록 하신다. 이 세 가지 덕행이 우리의 새 삶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한다는 뜻에서 대신덕이라고도 한다. 믿음의 은총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과 구원의 말씀을 알게 되며, 희망의 덕행을 통해서 하느님은 당신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뢰감을 주신다. 사랑은 하느님이 친히 주시는 온전한 마음과 힘과 생명을 가지고 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덕행 중에 제일 큰 것은 사랑이며(1고린 13,13), 그리스도인의 윤리생활 전체는 이 세 가지 덕행에 기초하고 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하느님과 영원한 친교를 누리도록 우리의 마음을 이끈다. 그래서 이것들을 '대신덕(對神德)'이라 부른다. 사람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자유롭게 응답해야 인격적 응답이 된다. 


21장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생활



1. 신앙 

<요점정리> 
▨ 신덕(信德) 즉, 신앙은 무엇인가?
신앙은 성령의 은혜로서, 하느님께서 밝히시고 교회에 맡기신 진리를 하느님의 진실하심과 더불어 확실히 믿는 덕이다.
신앙은 '인간 구원의 시작이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 기초이며 근원이다.' 신앙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응답, 희망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응답을 뜻한다. 그렇지만 좁은 의미로는 희망과 사랑과는 구별되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한 측면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믿는 사람에게도 늘 의문이 따라 다닌다. 신앙은 진리를 찾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부분적인 해답일 따름이다. 신앙이 가르치는 내용만은 확실하게 믿을 만한 것이지만, 그 내용이 영원한 생명의 전부를 다 밝혀 주지는 못한다. 주님은 신앙으로 생활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필요한 경우에는 우리 신앙을 고백할 마음 자세를 갖도록 요구하신다. 이 의무를 그리스도는 매우 확실하게 하신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마태 10,33). 

2. 희망 
<요점정리> 
▨ 망덕(望德) 즉, 희망은 무엇인가?
희망은 하느님께서 태워 주신 덕행으로서, 예수의 공덕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생을 바라고, 그 복을 얻기에 요긴한 모든 은총을 하느님의 성실하심과 자비하심에 따라 굳이 바라는 덕이다.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교적 이상이 아니다. 하늘 나라를 상속할 무수한 형제자매의 한 사람으로서 각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힘써야 한다(로마 8,29).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도 하느님을 등지고 돌아설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하느님의 성실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도 성실히 응답해야 한다.
인간의 완성이 우리의 최종 목표다(마태 5,48). 그리고 이 완성은 개인에서 인류사회 전체의 진보와 발전이 포함된다(민족 16∼17).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현세의 생활을 장차 올 영생과 분리시켜서는 아니된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이 다가 왔으니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라고 외치면서 현세 생활을 떠나 기도와 집단 생활을 강조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현세 생활이 우리 마음을 더럽히므로 세상을 떠나 살아야 구원을 얻는 양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의 희망과 맞지 않는 생활태도라고 하겠다. 영생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행한 선업(善業)은 이 세상을 건설하면서 동시에 영원한 나라를 건설해 간다. 없어질 세계는 악이 들끓는 세계, 피조물들의 죄로 일그러진 세계이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악한 수단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3. 사랑 

<요점정리> 
▨ 애덕(愛德) 즉, 사랑은 무엇인가?
애덕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덕행으로서, 온전히 착하시고 아름다우신 하느님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며, 또 하느님으로 인하여 이웃을 자기와 같이 사랑하는 덕이다.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핵심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어 우리 마음속에 당신 사랑을 부어 넣어 주신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니다. 내 직장의 동료들과 부하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장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해 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킨다. 사랑의 계명은 모든 계명을 요약한 것으로,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여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리고, 모든 사람에게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여 인류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도록 재촉한다(요한 17,13). 따라서 신자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활동해야 할 임무가 있다"(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3).

4. 죄 

<요점정리> 
▨ 죄란 무엇인가?
죄란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요,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며, 하느님과 맺은 사랑의 계약을 파괴하는 것이며, 또한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것이다. 죄는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며 동시에 미움과 질투와 교만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거스르는 것이다. 
▨ 대죄(大罪)란 무엇인가?
대죄는 자유의지로 하느님과의 친교를 단절시키거나 하느님과의 소원한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다. 
▨ 소죄(小罪)는 무엇인가?
자신의 자유의지 없이 범하는 죄도 여기에 해당되며 가벼운 죄로서, 대죄와 달리 하느님과의 친교를 단절시키지는 않는다.
죄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의 행위다. 죄는 하느님께 대한 인격적 침해요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다. 이 이유 때문에, 알고 자유를 가지고서 한 행동과 그렇지 못한 행동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본시 나쁜 행동도 무지나 자유가 없이 했을 때 죄가 되지 않을 수가 있다.
죄는 대죄와 소죄로 나뉜다. 대죄는 하느님과의 친교를 단절시키거나 하느님께로부터 소외된 상태이며 영혼의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자격을 포기한다. 대죄는 하느님의 계명과 교회나 국가에서 세운 법을 알고도 자유로이 범할 때 성립된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매우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했다면 그는 대죄를 범한 것이다. 대죄는 한 번의 사건이 아니고 사람의 생활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사람은 '대죄의 상태'에 있을 수가 있다. 즉 하느님 사랑에 귀의하지 않고 그분께 성실을 바치지 않는 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
대죄를 범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전부에게 얻어 주신(요한 17,16) 풍부한 새 생명에 대해서는 온전히 죽은 몸이다. 뉘우치도록 하느님이 먼저 그를 움직여 주시기 전에는, 생명에로 돌아서기 위해 아무 것도 스스로 하지 못한다.
소죄는 은총의 생명 및 하느님과의 친교를 전부 박탈하지 않는다. 인간의 나약성과 결함으로 일상 속에서 범하는 사소한 죄들이다. 소죄는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하나의 실수요, 주저함이요, 잘못이다. 중대한 본분을 가벼운 정도로 범했을 때도 소죄가 된다. 도둑질을 하되 사소한 물건을 훔친 경우이다. 중대한 잘못을 범하긴 했으나, 온전한 의식과 자유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소죄가 되기도 한다. 

5. 하느님에 대한 계명: 1∼3 계명 

(1) 제1계명: 하느님만을 공경함 

<요점정리> 
▨ 제1계명이 명하는 것과 금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느님만을 모든 것 위에 공경하여 높이도록 명하며, 하느님께만 드릴 공경을 사람이나 대상에게 드리는 것을 금한다. 
▨ 하느님께만 드릴 공경을 사람이나 대상에게 드린다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온갖 미신을 숭상할 때 그렇게 되는 것으로서, 마귀와 잡신을 섬기거나 점이나 사주팔자를 보면서 길흉화복을 미리 알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을 창조주이며 가장 높은 주님으로 알아 최고의 공경을 바치고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하느님만을 예배할 의무를 지워준다. 하느님은 행복의 원천이고 사랑의 원천이며 우리 최후의 목적이므로,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느님께 대한 존경과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 이외의 다른 신에 대한 믿음은 미신이며, 신앙인으로서 이런 행위를 한다면 배교와 불신의 행위이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대신에 그 어느 것도 그분의 자리에 올려 놓을 수 없다.
현대에 와서 명예, 재산, 스포츠, 건강, 권력, 학력과 같은 것들이 하느님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는 경우가 자주 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먼저 생각하여 하느님을 잊고 산다면 이 모두가 우상이 될 것이다. 미신과 독성(瀆聖)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에 직접 상치되는 죄이다. 독성죄는 하느님 예배에 봉헌된 사람이나 사물을 함부로 다루는 행위이다. 중죄를 범한 상태에서 성체, 견진, 성품 및 혼배 등의 성사를 받는 행동은 특별히 중대한 독성죄가 된다. 

(2) 제2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음 

<요점정리> 
▨ 제2계명이 명하는 것과 금하는 것은 무엇인가?하느님의 이름을 정성되이 부르되,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과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이며, 거짓 맹세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과 저주하는 것을 금한다.
둘째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공경하도록 명한다. 우리는 존경하는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께 존경을 드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는 마땅히 그분에 대하여 헛된 언행을 삼가야 할 것이다. 위증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른 다음에 거짓을 말하는 짓이다. 하느님께 그분의 이름으로 서약한 바를 실천하지 않는 일도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짓이다. 구세주께 빌어 타인에게 해를 주시도록 하는 것도 불경의 죄이다. 하느님을 비방하는 독성(瀆聖)은 특히 중대한 죄이다.
일부 정치가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국민을 속이는 행위, 일부 종교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일, 하느님의 이름을 걸어 자신의 이기적 행위를 미화시키는 일 모두가 하느님의 이름을 파는 것으로서, 제2계명에 어긋난다 하겠다. 

(3) 제3계명: 주일을 거룩히 지냄 

<요점정리> 
▨ 제3계명이 명하는 것은 무엇인가?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노동을 쉼으로써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도록 하는 것이다. 
▨ 교회가 구약의 안식일(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주일(主日)로 지내는 까닭은 무엇인가?안식일이 아닌 일요일에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발현하셨으며, 또한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려 참된 의미로 교회가 세워진 날이기에 초대교회부터 일요일을 주일로 지내게 된 것이다.
셋째 계명은, 주일을 거룩히 지낼 것을 명한다. 주일과 대축일에는 미사에 참례할 중대한 의무가 있다. 미사 참례할 대축일은 예수님의 성탄대축일과 성모승천대축일(8월 15일)과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대축일(1월 1일)이다. 그날의 특색이 될 축제의 정신과 주님 안에서의 기쁨을 방해할 만한 노동을 삼가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꼭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예배에 관한 이 계명을 면제받을 수 있다.
이 계명의 본래 의도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하며, 따라서 종들에게 일주일에 하루는 쉴 수 있게 하는데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이에게 쉴 시간도 주지 않고 일만 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더 나아가서 내 밑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고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또 우리 자신은 쉬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6.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사랑에는 순서가 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 다음으로 자신을 위한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르 12,31)고 명하셨다. 올바른 자기 사랑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이웃을 올바로 사랑하지 못한다. 각자 자기의 구원과 참다운 선을 염려하고, 추구해야 하며, 이것은 사람의 첫째가는 도리이다. 그 대신 무질서한 자기 사랑은 모든 죄의 근원이다. 인간 생활의 중심은 하느님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자기를 중심으로 선택하는 것은 오만이며, 오만은 죄의 뿌리이다.
이웃 사랑은 중요하며, 십계명 중의 나머지 일곱 계명이 바로 이것을 다루고 있다. 어느 면에서 이웃 사랑이 그리스도교 윤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은 서로 형제가 되며 그리스도와도 형제가 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 올바른 자기 사랑 그리고 하느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7. 윤리덕(倫理德)
올바른 자기 사랑은 다음 몇 가지 덕행으로 지탱된다. 그 첫째는 겸손으로서 그리스도교 덕행 중에서 제일 특색있는 덕이다. 자기는 일개 피조물이요, 자기에게 선한 것이 있다면 오로지 하느님의 선물이고, 따라서 하찮은 자아를 뽐낼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함을 깨닫게 만드는 까닭이다. 겸손은 아무리 비상한 자질을 타고 났어도 모든 것이 하느님 선물임을 인정하고 감사드린다.
인내도 매우 필요한 덕이다. 사람이 바라는 모든 희망은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부활에 앞서 십자가가 있고, 하느님이 정해두신 때를 기다려야 하는 세상에서 자기를 올바로 사랑하자면 인내가 필요하다.
절제, 혹은 자제심이 없으면 자기도 남도 사랑하지 못한다. 절도있는 사람은 당장의 만족을 요구하는 행동과, 우정과 희망을 깨뜨리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자행하기 보다는, 분별과 신앙의 빛이 가리키는 참 선을 추구한다. 그릇된 자기 사랑으로 눈 앞의 것을 갈망하는 방종은 자신을 파괴한다. 나약한 인간성을 지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로마 7,24) 위에 말한 덕행을 쌓을 수 있다. 덕행에 진보하려면 은총에 귀기울여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22장  가치있는 생활(5.6.8.9 계명)



1. 제5계명: 생명의 존중 

<요점정리> 
 우리는 왜 몸과 생명을 존중하는가?우리의 몸과 생명은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서 하느님이 창조하셨고, 또한 세상 마칠 때에 부활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제5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인가?사람을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자기 자신이나 남의 영혼과 육신을 해치는 것을 금한다.

이 계명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창조주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생명을 보호하고 존중해야 하며 인간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므로 인간이 생명을 임의로 처분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살인, 자살, 지체 절단, 안락사, 낙태 등의 행위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 이외에도 인간 생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자연환경의 보호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1) 세 가지 기본적 가치
세 가지 기본적인 가치 즉 생명, 출산, 진리는 사랑과 정의의 구체적 행동으로만 이루어지고 키워진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자면 행동을 제한하고, 살인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보다는 우리의 소명은 구체적으로 생활 안에서 기본적인 가치가 충만되게 함으로써 개인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을 보이라는 것이다. 실생활에 있어서는 보통으로 한 가지의 가치에만 주로 헌신하게 된다. 그래서 아마 의사나 간호사, 구급차 운전기사, 병원 직원, 소방관 등 생명 보호에 직접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도 있고, 농부나 기타 직업도 간접적이지만 같은 생명 보호에 헌신하는 것이다. 

(2) 생명의 존중
사람은 육체적 생명을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수고로써 자기 생명을 보존할 의무를 가지는 동시에,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주고, 곤경 중에 있는 사람을 도울 중대한 의무도 갖고 있다(마태 25,41-46). 자살도 살인도 불가하다. 이 두 가지 행동은 "생명 자체를 거부하는"(사목헌장 27) 행동이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죽음을 가져오는 모든 행동이 생명 자체를 거부하는 행동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살인하지 못한다"(출애 20,13)라는 제5계명은 "죄가 없고 올바른 사람을 죽게 하지 말라"(출애 23,7)로 알아듣는 것이 더욱 정확할 듯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전쟁 행위를 악행으로 정죄(定罪)하진 않는다. 부당하게 공격을 받는 사람은 저항할 권리가 있다. 생명에 대한 정당 방위는 살인이 될 수 없다. 진정 가해자의 불의한 폭행을 막을 다른 길이 없다고 인정되면, 합법적 권력자가 제정한 법에 따라 가해자를 처형하는 것을 교회는 정죄하지 않았다.
순교자의 의도는 진리를 선포하고 또한 하느님에게 충성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선택은 분명히 생명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내거는 행위 또한 자살과는 구별된다. 

(3) 낙태
낙태의 희생자는 확실히 무죄하고, 특히 무기력하다. 양육 부담 때문이거나 혹은 높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는 소망은 이해할 만하다 해도 그것 때문에 태아를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낙태 행동에서 인간의 기본 가치에 대한 멸시, 이웃에 대한 사랑의 부족, 뚜렷한 정의심의 부재를 본다.
어떤 경우에는 어머니의 생명과 태아의 생명이 함께 위태롭게 되는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무죄한 인간 생명을 직접으로 그리고 고의로 침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원칙은 유아의 생명이나 어머니의 생명에도 적용된다.
교회는 유아의 생명이 어머니의 생명보다 우선권을 가져야 한다고 한번도 가르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생명을 구제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고 한다. 임신 조건과는 상관없이 앓는 어머니의 생명을 구제하는 수술에서,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았으나 불가피하게 태아를 죽이는 결과가 따른다면 이 때는 무죄한 생명에 대한 직접적인 침해라고 할 수 없다. 


2. 제 6·9 계명: 가정과 순결 

<요점정리> 
 제6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인가?제6계명이 금하는 것은 간음(姦淫)과 사음(邪淫)뿐 아니라, 온갖 부정한 행실과 그 위험한 기회까지이다. 
 제9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인가?제9계명이 금하는 것은 온갖 음란한 생각과 음란한 것을 원하는 것이다.
교회는 언제나 성(性)을 귀중하고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 왔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성(性)을 올바로 사용하고 정조를 보호하라는 계명으로서 정당한 부부관계 이외의 이성관계에서 성(性)의 남용을 금한다. 그리고 성(性)을 절대시 하거나 성(性)이 인간의 전부인 양 생각하며 문란한 성도덕(性道德)과 온갖 성범죄에 노출되어 있는 현대인에게 "탐내지 말라"고 그 의도마저 금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이다. 

(1) 잘못된 성
청소년들은 때때로 자위행위와 동성행위의 죄악성을 거의 모르면서 범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행위는 인간의 기본 가치에 대한 존경을 분명히 이탈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고의적으로 그리고 자유로이 자행하는 것은 대죄이며, 또한 하느님의 나라에 위배되는 죄악이라고 교회는 똑똑히 그리고 계속해서 가르쳐 왔다. 성적 죄악을 범하려는 진정한 의도를 갖거나, 상상을 통해서 즐거움을 맛보자는 고의적 의도는 죄악이다(마태 5,28). 

(2) 혼인과 출산
혼인에서 요청하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자신을 배우자에게 온전히 주는 것이다. 성교는 서로 자신을 바치는 것을 나타내며 표현한다. 그래서 성행위가 만일 이상과 같이 서로 자신을 바치는 것과 동떨어져 있다면 잘못된 것이다.
무슨 이유로 결혼 전에는 자유로이 성교를 하지 말아야 하는가? 왜 성교는 혼인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성교가 본성적으로 인간 생명을 전달하게 되어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혼인과 부부애는 그 성격상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한다. 과연 자녀들은 혼인의 가장 뛰어나는 선물이며 부모의 행복을 위해서 크게 이바지한다. 그러므로 참된 부부애의 실천과 여기서 나오는 가정생활의 전체 의미는 부부가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의 사랑에 협력하기 위하여 용감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창조주는 부부를 통하여 당신 가족을 날로 자라게 하신다. 부부는 인간의 생명을 전달하고 교육하는 것을 자기들의 고유한 사명으로 알아야 한다"(사목헌장 50).
성(性)과 애정과 출산 사이의 유대가 매우 밀접하기 때문에, 출산을 지양하는 애정관계 밖에서 이루어지는 성행위는 잘못이다. 다시 말하면 혼인 밖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성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성행위가 출산이나 혹은 남녀간의 애정에서 분리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면 모두 잘못이다. 

(3) 순결과 절제
순결을 위한 한 가지 중요한 보호책은 절제이다. 그리스도교적인 절제는 신자들에게 자신들이 받은 소명에 적절히 응답하면서, 이상의 모든 영역에서 지혜롭게 처세하도록 도와 준다.
성도덕이 매우 문란한 시대나 환경에서라도 그리스도교적 순결과 절제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런 덕행의 성장은 기도의 정신, 성체배령(聖體拜領), 동정녀 마리아께 대한 신심 등으로 도움을 받아 위선이나 편협함에서 나온 것이 아닌 참 기쁨과 평화에로 이끌어 준다. 순결과 절제는 변함없고 사심 없는 사랑이 싹틀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다.

(4) 피임
혼인은 책임성있게 생명을 전달하는 동시에, 특별한 애정을 키우라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 교황 비오11세의 말대로 모든 부부행위가 인간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출산할 자연적 힘을 빼앗긴다면, 하느님의 법과 자연법을 거스리는 범죄가 된다. 그러므로 임신을 직접 방지할 목적으로 실행되는 모든 행동은 그리스도인의 행동에서 없어져야 한다. 그와 같은 목적을 위해서 하는 각종 단종수술(斷種手術)도 배격되어야 한다. 

(5) 가족계획
출산이 요구하는 것은 부부가 되도록 많은 자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자녀를 가질 것인지 그리고 언제 가질 것인지 결정할 때에, 부부는 "자신들의 행복과 아울러 이미 태어난 자녀들과 앞으로 태어날 자녀들의 안녕을 참작하여야 한다. 부부는 이런 것을 하느님의 면전에서 결정지어야 한다"(사목헌장 50).
그리고 부부가 적당한 자녀 수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에는 임의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원칙을 따라야 한다(사목헌장 50). 자녀를 더 낳지 말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부부에게 있다면, 그들은 두 가지 방침을 택할 수 있다. 첫째로 임신이 가능한 시기에는 부부가 성교를 피하는 것이다. 둘째는 부부가 다른 시기를 택하여, 부부애의 충실함을 표현하고 즐거움을 체험하고자 성행위를 할 수가 있다. 
주기절제법은 출산에 대한 산아조절법으로서 완전히 옳고 합당할 뿐 아니라, 제 나름대로 진정한 가치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자연적 가족계획법은 무책임한 출산을 피하게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방법은 부부관계에 더 많은 인간적 사랑이 흐르게 하며, 서로를 염려해 주는 습성을 기르고 서로의 사랑을 속되게 만들 수도 있는 과도한 자애심을 피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사목헌장 47). 

3. 제8계명: 진리를 증언함 

<요점정리> 
 제8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인가?제8계명이 금하는 것은 거짓말과, 말로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인권과 명예를 존중하고 보호하라는 계명으로서, 거짓말을 해서 남에게 정신적, 물질적 손해를 끼치는 행위, 모욕적인 말, 이간질 등을 금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를 증언하려고"(요한 18,37) 이 세상에 오셨다. 인간이 종교 자유의 권리를 가지는 까닭은 인간에게는 종교 진리를 인격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탐구할 중대한 의무가 있고 그리고 자유는 그런 탐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자유 1∼2).
또한 예컨대 사람에게는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탐구하고 발표하여 선전하는 일에 있어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 말고도 적절한 정보를 받을 권리가 있다(매스미디어에 관한 교령 5). 정보는 사람이 받아들일 준비를 갖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므로 교육을 받을 권리도 있다.
우리에게는 진실을 찾고 말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타인에 대하여 정직해야 한다. 거짓말은 잘못이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에페 4,24-25). 거짓말로써 피해나 손실을 피하고 혹은 생명을 구한다 해도 순수한 거짓말은 금지된다. 
선서를 하고도 거짓말을 할 때 특히 중대한 잘못이다. 선서할 때에는 선서자가 자신의 증언, 주장 혹은 의도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모든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부르기 때문이다.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서(레위 19,12) 교회는 이유와 사정이 어떻든지 고의적 위증은 언제나 대죄라고 계속 가르쳤다. 사람들간의 진정한 화목을 유지하기 위하여 비밀을 지켜야 할 경우가 있다. 그러나 거짓말은 하지 말 것이다. 부당하게 정보를 뿌리는 사람은 때때로 친구를 배신하거나, 혹은 수호해야 할 다른 가치를 해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는 사람이 침묵을 지키거나 다른 사람들이 속는 것을 내버려 둘 수도 있고, 자기의 대답이 완전한 대답이 아니란 것을 말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제 8편
23장  의로운 사회 건설(4.7.10 계명)


1. 두가지 기본 원칙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적 믿음, 희망, 사랑의 기본적 요구 조건을 실행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두 가지 기본원칙에 기초를 둔다. 첫째, 사람은 다른 사람과 공동체를 이루지 않을 때 또한 그 공동체 안에서 봉사하거나 봉사받지 못할 때, 사랑하거나 사랑받지 못할 때 완성을 이룰 수 없다.
둘째, 사람은 하느님에게 깊은 개인적 투신을 하지 않을 때도 완성을 이룩하지 못한다. 즉, 인간은 사회적 존재인 동시에 초월적이며 존엄성을 가진 존재이고, 하느님과의 개인적 접촉을 갖도록 불리운 존재라는 것이다. 

2. 평등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평등하다. 왜냐하면 "만인이 이성(理性)을 지닌 영혼을 가지고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어 같은 본성과 같은 기원을 가졌으며, 그리스도께 구원된다는 같은 목적에로 함께 불리웠으므로 모든 사람의 기본적 평등은 더욱 명백히 긍정되어야 하기"(사목헌장 29) 때문이다.

3. 공동선(共同善)
공동체는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뭉쳐 있다. 공동선이란 "집단이나 구성원 개개인이 보다 완전하고, 보다 용이하게 자기 완성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생활상 여러 가지 조건들의 총체"(사목헌장 26)이다. 

4. 상호 보완의 원리
상호보완의 원칙은 "개인의 창의와 노력으로 완수할 수 있는 것을 개인에게서 빼앗아 단체에 맡기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하급의 작은 단체가 이행할 수 있는 기능과 봉사를 상급의 큰 단체에 떠맡기는 것도 부정이고, 중대한 해악이며, 바른 질서의 교란이다. 모든 사회활동은 본질상 사회 조직체의 성원을 돕는 것이지, 그 성원들을 파괴하거나 흡수해서는 안된다"(어머니요 스승 33). 개인이나 작은 집단이 하나의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할 경우에만 더 큰 집단이 그 임무를 맡아야 한다. 

5. 제4계명: 가정 공동체 

<요점정리> 
 제4계명이 명하는 것은 무엇인가?제4계명이 명하는 것은 자녀가 부모에게 할 본분과 또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할 본분이다. 
 자녀의 부모에 대한 본분은 무엇인가?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순명하며, 영혼과 육신의 모든 문제를 도와 드리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할 본분은 무엇인가?부모는 자녀가 종교 교육과 도덕 교육을 받도록 힘쓰면서 그들의 생활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1) 부부 공동체
부부 공동체는 '인간 사회의 시작이고 기반이며' 사회의 활력있는 기초 세포가 되는 것이다(평신도 11).
따라서 "국가 권력은 혼인과 가정의 본질을 인정하고 보호하며 향상시키는 동시에 공중도덕을 수호하고 가정의 번영에 이바지하는 것을 성스러운 임무로 알아야 한다"(사목헌장 32). 특히 "정부시책에 있어서는 주택, 자녀교육, 노동조건, 사회보장, 납세 등에 관한 가정의 요망을 고려해야 한다"(평신도 11).
정부는 "그 권한의 범위 내에서 국내의 인구증가 문제에 관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사목헌장 87). 그러나 정부와 공권자의 기능은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결혼과 산아에 대한 인간의 양보할 수 없는 권리에 따라 출생할 자녀의 수를 결정하는 것은 양친의 바른 판단에 달린 것이므로, 절대로 공권의 판단에 맡길 수는 없다"(사목헌장 87). 

(2) 자녀교육
"양친은 자녀에게 생명을 주었으니 자녀를 교육해야 하는 중대한 의무를 진다. 그러므로 양친은 자녀의 첫째이며 으뜸가는 교육자로 인정되어야 한다"(교육 3).
이 문제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은 양친과 교육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의 의무와 권리를 옹호하는 것,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 더우기 양친과 다른 집단의 노력이 부족할 때에 양친의 요망을 고려하면서, 상호 보완의 원리를 적용하여 교육사업을 완수하는 것, 공동선이 요청할 때 학교와 교육시설을 설립하는 것이다"(교육 3). 또한 정부는 "학교 또한 교육기관을 진정한 자유로 선택할 부모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자유 5). 국가는 청소년들이 공동체의 자유롭고 평등한 성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교육에 임해야 한다. 

(3) 부부의 평등
남녀는 인간 존엄과 기본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사목헌장 29). 남녀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거나 남자가 여자보다 월등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는 진정한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혼인은 실질적으로 동등한 사람들의 결합이지만, 한편으로는 두 당사자가 고유한 역할을 가지므로 서로 충족시키고 완성한다. 

(4) 부모와 자녀 관계
부모에 대해서 이행해야 할 자녀의 의무는 부모의 분명한 지시에 그저 복종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면서 평생 동안 부모에게 관심을 두어야 한다(사목헌장 48).
자녀들이 복종하는 동기는 공포에 있지 않고 사랑, 감사, 겸손에 있어야 한다(집회 7,27-28). 자녀들이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나면 그들 자신이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며, 결정을 대신해 줄 권리가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이 성숙한 태도로 자신의 삶의 길을 결정하는 것이다. 

6. 제4계명: 이상적 정치 체제 - 정부와 국민
인간성에 완전히 부합하는 정치 공동체는 "정치 공동체의 법적 기초를 설정하고, 국가를 통치하고, 여러 기관들의 영역과 목표를 규제하며, 위정자를 선출하는 활동에 능동적으로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사목헌장 75)를 모든 국민에게 주는 공동체이다.
정부는 명령할 권리가 있다. 합법적 정치권력이 윤리질서의 한계 내에서 공동선을 위해서 행사될 때 국민들은 "복종해야 할 양심상의 의무를 가진다"(사목헌장 74). 위정자가 윤리질서에 위배되고 따라서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법이나 긴급령을 제정한다면, 그런 명령은 국민의 양심을 구속하지 못한다. "사람에게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사도 5,29). 국민들이 자연법과 복음이 정한 한계를 지키면서, 공권의 남용에 대항하여 자신과 동료 시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합법적이다(사목헌장 74).
권리의 악용을 억제하는 것도 정부의 의무이다. 양심을 지도하거나 엄밀한 면에서의 개인적인 행동을 통제할 권리가 공권자에게는 없다. 정치 공동체는 유일한 완전한 사회도 아니고, 국민의 영성 생활에 대하여 정당한 통할권을 갖는 것도 아니다. 영성 생활의 증진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수단은 교회 안에 있다.
"가톨릭 신자들은 참된 공동선을 촉진해야 한다는 의무를 자각하고, 국가 권력이 올바로 행사되고 국법이 윤리 원칙과 공동선에 일치하도록 그 의견을 관철시켜야 한다"(평신도 14). 

7. 제7계명: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요점정리> 
▨ 제7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인가?불의하게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손해를 끼치고 그러한 일에 협력할 뿐 아니라, 자기 재산을 낭비하는 것을 금한다.

불의하게 타인의 물건을 빼앗는 행위나 다른 사람의 재산을 침해하는 행위, 강도, 절도, 소매치기, 사기, 속임수 장사, 과대광고 등을 금하는 계명이다. 

(1) 사유재산권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이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과 정의 안에서 공정하게 풍부히 나누어져야 한다"(사목헌장 60). "그러므로 누구나 이 재화를 사용함에 있어서 합법적으로 소유하는 재물을 사유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공유물로 여겨야 한다"(사목헌장 69). 한걸음 나가서 "사람이 극심한 빈곤 중에 있으면, 필요한 것을 타인의 재화에서 취득할 권리를 가진다"(사목헌장 69). 경제 활동과 생산의 기본 목적은 인간에 대한 봉사인 것이다. 교회는 개인이 사유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지만, 각 사람의 재물에 대한 소유권과 기타 통할권은 인격의 발전에 봉사되고 쓰여져야 한다. 재산은 인간의 삶을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므로 알맞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사치와 허영에 들떠 돈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도 이 계명에 어긋나는 일이다. 

(2) 노동
인간은 자기의 노동에서 나오는 보수의 일부를 저축하기로 자유로이 결정하는데, 정당한 보수는 "본인과 그 가족들에게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생활을 제공할 정도의 것이라야 한다"(사목헌장 69). 동시에 기업체를 형성하고, 노동조합을 세우고, 경제 활동에 있어서 노동자의 참여를 신장하는 방법을 강구할 권리도 인정한다(어머니요 스승 82∼103; 108∼121). 

8. 정의와 평화
정의 없이는 평화가 지속되지 못하므로 모든 사람은 평화와 동시에 정의를 추구하는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평화는 정의의 산물이고 사랑의 결실이다. 평화는 불목의 근본적인 뿌리까지 극복시킨다. 국가간의 극심한 경제적 불균형도 긴장의 원인 중의 하나이다. 기타 원인은 권력을 과도히 추구함과 인권을 멸시하는 데도 있다. 좀더 깊은 원인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고, "인간적 질투, 불신, 교만, 기타 이기적 사욕에 있다"(사목헌장 83).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관심은 영생이며 그 영생은 이 세상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심고 자비, 정의, 평화를 추구할 중대한 책임이 있다. 


24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



1. 그리스도인의 첫째가는 계명
우리는 실제로 매우 다양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오직 하나의 길, 사랑의 길 뿐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루가 10,27).
위대한 사랑의 두 가지 계명은 서로 보완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먼저이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1요한 4,21).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현세적 요구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최소한의 사랑, 즉 약간의 기도와 주일미사에 겨우 참여하고 대죄를 피하기는 하되 이웃 사랑의 실천이 냉냉하다면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계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 대한 깊은 내적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봉사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은 친척이나 친구나 친지들만 사랑할 뿐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 신자들의 완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대한 인격적인 사랑과 이웃에 대한 형제로서의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다. 

2. 평신도 사도직(평신도의 소명)
하느님은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을 부르셨다. 즉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당신의 예언자요 사제이며 왕이 되도록 부르셨다. 이것을 우리는 평신도 사도직이라고 한다.
우리는 각자가 처해 있는 곳에서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신앙과 사랑으로 무장한 평신도는 자신이 받은 소명 안에서 죄악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이 세상을 새로 건설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며, 동시에 정의와 사랑에 기반을 둔 현세 질서를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
세례성사로 사도적 소명을 받은 각 신자는 자기의 생활로써 신앙을 선포해야 한다. 평신도 사도직은 '생활의 증언'만으로는 부족하다. "참된 사도는 말로써 그리스도를 전할 기회를 찾는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신앙에로 인도하고, 신자들을 가르쳐 굳세게 하고, 더욱 열심히 살도록 격려한다"(평신도 6).
평신도 사도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면 영성 훈련과 신앙에 관한 교리교육과 사도직에 관련되는 학문과 기술에 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개개인이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준비할 수 있으나 평신도 사도직을 위한 단체도 있다. 많은 이들이 신심회, 자선단체, 사도직회, 혹은 제3회 등에 가입함으로써 사도직을 위한 교육에 도움을 받는다. 이런 단체를 통하여 평신도는 성직자와 보다 더 직접적이고 밀접히 협력하게 되고, 교회 일치와 공동체적 성격을 잘 조화시키면서, 교회가 사도적 목표를 향하는 데에 자신들의 기술과 경험을 바치게 된다. 

3. 수도 소명
모든 사람은 계명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좀더 훌륭한 삶에 대한 갈망을 느끼는 사람은 좀더 큰 자유 안에서 하느님께 접근할 수 있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 안에 살고자 한다. 그래서 수도생활에 들어가는 이들은 완덕에 대한 복음적 권유 즉 정결, 가난, 순명을 지키기로 맹세한다.
복음적 권유를 지키면서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르려는 결의는, 인간적 판단과 세속의 원리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사람이 당연히 추구하는 여러 가지 자랑스러운 목표, 즉 혼인으로 이루는 신앙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가정, 재산의 소유, 정당한 자기 주장 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신을 비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상의 것을 포기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필립 3,8) 그들은 온전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가난의 서원으로써 수도자는 개인재산이나 재산관리를 포기하여,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지신 그리스도를 본받고(2고린토 8,9), 세상 물건에 대한 과도한 사랑을 피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가난하고 미소(微少)한 많은 형제들에게 위로와 도움이 되려고 한다.
독신자는, 인간의 성(性)이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지만 사랑은 오직 한 가지 형태일 뿐이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수도자는 순결로써 "하느님이 제정하였고, 내세에서 완전히 드러날 혼인, 즉 교회가 그리스도를 유일한 신랑으로서 차지하는 저 경탄스러운 혼인을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환기시킨다"(수도생활의 쇄신과 적응에 관한 교령 12).
순명의 서원도 현대적인 사고방식에 도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순명이 덕행이라고 보기 어려워하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순명을 본받는 순명이 인간의 정신을 풍요케 한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순명은 비굴하거나 노예적인 순명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보내신 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굳은 의지로 극심한 고통을 감수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좋으실 대로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로마 15,3) 성부께 대한 그리스도의 순명은 위대하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종으로서의 모습은 성숙한 순명이다.
수도자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사랑, 이해, 동정심, 진리를 타인들에게 보여야 한다. 수도생활은 교회 안에서 빛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길을 밝혀 준다. 

4. 관상 수도회
세계와 인류 전체를 위하여 의미있는 일들 중에서 기도, 순명, 극기, 고립, 침묵의 생활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 가장 좋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교회는 언제나 '쇄신'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관상 수도회가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항상 뛰어난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교회는 주장한다.
현대인에게 심각한 위험과 유혹은 지나친 활동주의이다. 외적 행동만으로는 세상을 구하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떠나서는 아무 궁극적 희망도 가질 수 없다. 은수자의 생활과 관상 수도자의 숨은 생활은 특수한 부르심이다. 

25장  은총과 신성에의 참여



<요점정리> 
▨ 은총이란 무엇인가?은총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거저 주신 초자연적 은혜이다. 
▨ 은총은 몇 가지가 있는가?생명의 은총(상존은총<常存恩寵>)과 도움의 은총(조력은총<助力恩寵>) 두가지가 있다. 생명의 은총은 하느님의 초자연적 은총을 뜻하며, 도움의 은총은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1. 은총
은총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거저주신 선물이다. 우리의 어떤 자격이나 능력을 보시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주시는 하느님의 초자연적 선물이다. 

2. 의화
사람은 원죄를 지니고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다"(골로 1,13-14).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화이다. 우리를 의화시킬때에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새 사람으로 갈아 입게"(에페 4,24)하신다. 죄로 말미암아 이방인이 되고 추방되었던 우리는 하느님의 삶에 참여하는 양자녀가 된다(1요한 3,1). 

3. 생명의 은총(상존은총)
하느님은 인간에게 다가와 은총을 베풀며, 이 은총은 우리 안에 머물러 우리를 내적으로 변화하도록 만드신다. 이 생명의 은총을 상존은총이라 부른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하느님이 먼저 주도권을 쥐시고 우리를 성화하는 능력을 선사하신 점에서 성화은총이라고도 부른다.
생명의 은총은 지속하는 선물이다. 그래서 성화은총을 상존(常存)은총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한번 이 은총을 받으면, 그 사람이 대죄로써 자신과 하느님을 분리시키지 않는 한, 이 은총은 머물러 있다. 성화은총을 보존한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성화은총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주님과의 친분 관계를 끊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인간은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다가가거나 죽음의 시간이 닥쳐올 때에, 하느님과의 우정 관계에 머물 필요가 있다고 교회는 자주 가르친다. 사람이 은총상태에 있지 않으면서도 '산 사람의 성사'(견진·성체·혼인·성품 성사)를 받는 것은 중죄이다. 성화은총 중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상속자가 된다. 

4. 성령의 은혜
성령은 모든 은총의 샘이시기에 은총과 더불어 성령의 은혜도 주어진다. 구약성서에서 성령이 구세주에게 슬기, 이해, 의견, 용기, 지식, 신심,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이사 11,2-3). 성령의 은혜는 사람이 하느님의 음성과 충동에 보다 빠르고 쉽게 순종할 수 있도록 준비 시켜주며 '복음적 행복'(마태 5,3-10)을 갈망하도록 부추긴다. 

5. 도움의 은총(助力恩寵)
도움의 은총(조력은총)은 우리가 실제로 사랑의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도움이다. 조력은총으로써 하느님은 당신의 길을 보도록 우리 마음을 비추시고, 우리의 결심을 굳게 하시어 당신의 길을 따르게 하시고 빗나갔을 때에는 돌아오게 하신다. 내적 조력은총이란 우리가 자유로이 구원의 활동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활기를 주시고 도우시는 선물이다. 외적 조력은총은 하느님이 우리를 움직이시어 당신을 알게 하고, 당신의 삶에 참여하게 하는 데에 사용하시는 모든 도움이다. 하느님은 신앙에 열심한 부모, 충실한 친구, 좋은 책, 훌륭한 음악, 병고와 시련까지도 우리를 위하여 사용하실 수 있다. 

6. 죄의 일곱 가지 근원 

<요점정리> 
▨ 죄의 일곱 가지 근원은 무엇인가?
죄의 일곱 가지 근원은 교만, 탐욕, 색욕, 분노, 탐식, 질투, 태만이다.

의화된 후에도 사람 안에는 죄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 은총상태에 있으면서도 죄로 기울어지는 것을 우리는 체험한다. 이런 악에로의 경향 혹은 욕정을 성 바울로는 '죄'라고 부른다. 그 경향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경향이 '죄'라고 불리는 것은 죄악을 낳고 죄악에로 기울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욕정은 여러 가지 죄 즉, 교만, 탐욕, 색욕, 분노, 탐식, 질투, 태만과 이런 경향에로 기울어지게 한다. 

7. 은총 안에서의 성장
은총은 생명을 주므로 우리는 은총 안에서 자라야 한다. 사람이 세례받을 때에는 은총상태에 있으나, 새로 태어난 우리는 아직 어린이에 불과하다(1베드로 2,2). 우리가 사랑을 행하고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계속 신앙 안에서 자라야 한다(에페 4,15).
우리를 성장시키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우리도 노력해야 한다(2고린 6,6).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열매 맺도록 협조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데 더 풍부해지고, 기도 중에 하느님께로 더욱 가까이 가며, 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결합한다. 

 제 9편
26장  그리스도와 기도생활


<요점정리> 

▨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란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돌리는 것이며, 하느님과의 대화이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1. 기도하는 이의 모범이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은 우리의 생활에 있어 기도가 제일 윗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루가 복음은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를 자주 묘사한다(루가 3,21; 5,16; 9,29; 10,21). 그리스도는 중대한 행동이나 사목 활동을 하기 전에 드러나게 혹은 은밀하게 기도하셨다(루가 4,1).
예수님은 사도들이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물었을 때, 기도의 완전한 모형인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는 거만하지 말며 성실할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예수님 자신도 단순하고 솔직한 말로 기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존재와 은총의 생명이 하느님에게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기도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신앙고백인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뜻과 계명에 겸손되이 복종하려는 마음으로(루가 11,9-13) 기도하므로 이기적인 기도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구원에 도달하지 못하며, 하느님의 계획에 의하면 어떤 은총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만 내려진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기반을 둔 삶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로써 표현되어 나온다. 

2. 기도의 3가지 효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기도의 효과는 세 가지인데 첫째, 기도는 하느님의 은총뿐 아니라 다른 혜택을 얻게 하여 마음이 영성적으로 원기를 얻게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기도 형태를 따르면 기도는 사람의 삶을 변형하는 효과를 낸다. 우리는 먼저 생활을 정리하고 나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지나친 활동을 피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내 활동이 기도이다'라고 하는 사람도, 자주 몸과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잘못하는 것이다.
셋째, 기도는 최종적으로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사람을 새롭게 한다. 태도와 가치관의 복합체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다듬고 가꾸고 훈련해야 한다. 기도의 마지막 결과는 그리스도의 평화, 자신 안에서 느끼는 조화로운 질서와 균형, 하느님 안에서 영원의 눈길로 이 세상을 보는 눈, 자신의 내부와 주위에서 일어나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가누는 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점차로 가까와지게 한다. 

3. 기도의 정의(定義)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기도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기도할 때에 우리는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로 돌리고, 그분을 흠숭하고 감사하며, 그분에게 은혜나 용서를 청한다.
현대에 넓은 의미의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정의 내린다. 기도는 대화이며, 하느님이 먼저 시작하시어 이미 첫 마디를 발표하셨다. 즉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 자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 되는 것이다. 미사에서 이것이 드러난다.
가톨릭 전통은 기도의 기반으로서 성서를 읽을 것을 적극 권장하며, 기도와 관상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라 하였다. 

4. 기도의 4가지 종류
목표나 이유에 따라 기도는 네 종류가 있다.
- 흠숭 기도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인간의 절대적 의존성을,
- 감사 기도는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 청원 기도는 무엇을 위한 요청을,
- 통회 기도는 죄에 대한 통회를 나타낸다. 
기도에 있어 이와 같은 요소는 서로 겹치는 것이 보통이다. 하느님께 향한 모든 참된 기도는 자연스럽게 흠숭, 감사, 통회가 포함되어 있다. 

5. 무엇을 청할 것인가?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무엇을 원할 때에만 하느님께 나아가 청하고서 그것을 즉시 얻지 못하면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기도를 중단한다. 이것은 분명히 비그리스도교적인 태도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 하신다(루가 11,13). 그러나 우리는 가끔 눈 앞에 당장 보이는 이익에 사로잡히거나 인간적인 생각으로 해로운 것을 청하기도 한다. 그러면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타당하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이나 청원기도의 대상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 정신에 따라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 나라의 오심,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는 것,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고 유익한 은총을 청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구체적 물건이나 재산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구원에 도움이 되면 기도로써 청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구원에 해로운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위해서 즉 자기가 평생에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고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은 정당하다. 또한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요구를 채우기 위해서 이웃을 위하여도 기도해야 한다. 

6. 참된 기도를 위한 기도자의 자질
그리스도교적 기도는 몇 가지 자질이 필요한데 그 중에는 정신 집중, 열심, 신뢰, 인내가 있다. 열심한 그리스도인은 기도할 때에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 뜻하지 않은 분심이 인간의 약점 때문에 일어나도 이런 분심은 기도의 가치를 파손하지 않는다. 기도는 정신의 활동 그 이상의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자신의 의지를 굽히는 것이다. 열성적 행동에 평화와 즐거움이 따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기도하기가 어려울 때라도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하고 하느님께 뜻을 굽힐 수 있다. 주님은 신앙에 기초한 굳은 신뢰심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마태 11,25). 의심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는 것이다(야고 1,6).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다가 결코 실망하거나 포기하거나 힘을 잃어서는 안된다(루가 18,1). 

7. 기도의 대상
그리스도인은 하나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께 기도한다. 삼위 모두에게나 삼위 중 한분에게 기도를 드릴 수 있다(요한 14,14). 우리의 기도는 최종적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고, 성모와 천사와 천상 성인을 향한 기도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도록 청하는 것이다(교회헌장 50).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에게 절대적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를 드린다. 성모와 성인에게는 다른 종류의 공경을 드리면서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고 그들에게 청한다(교회헌장 67).

27장  개인기도와 전례기도



1. 개인기도 
주님은 개인기도를 권장하셨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 주실 것이다"(마태 6,6).
개인기도를 위한 특별한 규칙은 없다. 장소나 자세는 자유롭게 기도에 적합하도록 한다. 그리스도 교회의 관습은 아침기도, 저녁기도, 식사 기도를 상당히 장려하며, 위험과 유혹을 당할 때에도 기도해야 한다고 권한다.
신앙인으로 살아가자면 개인기도라는 밑바탕이 있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개인기도는 전례기도를 위한 준비에도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개인기도를 잘 하지 않는 가톨릭 신자는 주일미사의 참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1) 소리기도(염경기도)
소리기도는 말로 표현하는 기도를 말한다. 소리기도는 지정된 기도문이나 자신의 말로 할 수도 있고, 큰 소리를 내거나 소리 없이 바쳐지기도 한다. 소리기도는 기쁠 때 또는 위험할 때 사람의 마음에서 솟아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으로 소리기도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시편, 삼종기도, 묵주 기도 등과 같이 지정된 기도문을 낭송하는 것이다. 암기할 기도문은 성호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 사도신경, 통회의 기도, 묵주 기도 등이 있다.
스스로 하는 기도는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 소리기도의 일종이다. 자발적인 기도는 두 가지 상황에서 나온다. 하나는 우리가 하느님을 생생하게 체험할 때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예배의 응답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크나큰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저절로 하느님께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상당히 긴 기간 동안을, 특히 어른이 된 후에는 감정상태가 고조된 것도 아니고 침체된 것도 아닌 담담한 시기가 올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시기에도 기도해야 한다. 어떤 열성이 없어도 계속적으로 간단없이 하느님께 신뢰하면서 기도생활을 해야 한다. 

(2) 마음기도
마음기도의 특성은 마음 속으로 깊이 하는 것이다. 이때 지능과 의지는 하느님에게 온전히 향해져 있다. 마음기도는 하느님께 더 일치하게 한다. 일정한 시간을 이 마음기도에만 바치면서 다른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음식 만들기나 운전 등 무엇을 하면서 내적으로 기도할 수도 있다. 마음기도는 영성생활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수단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다. 성덕은 하느님의 정신을 가지고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17세기 이래 영성저자들은 마음기도의 3단계를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그 3단계를 묵상, 애정기도, 관상이라고 부른다. 기도생활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은 틀에 박힌 묵상에서 좀더 단순하고 직접적 관상에로 진전한다. 
①묵상(默想)
묵상은 사색적인 기도이며 하느님과 성인들과의 일치를 이루며 어떤 결심에 이르게 한다. 교회의 초기 교부들과 수도자들은 지정된 시간에 영적 서적이나 성서를 읽으면서 묵상하고 기도하였다. 이것이 묵상의 최초 형식 중에 하나이고, 가장 단순한 것으로 남아 있다.
모든 묵상 방법은 준비, 마음기도, 결론에 이르는 세 요소를 지닌다. 묵상의 먼 준비는 묵상자의 생활 전체이다. 가까운 준비는 조용한 곳에서 성서나 다른 종교서적의 일정한 부분을 읽고, 자신을 하느님의 현존 앞에 두고, 자신이 묵상을 잘 하도록 글이나 행동으로 청한다. 묵상의 주요 부분은 주제에 관한 성실한 고찰이다. 묵상기도는 기억, 상상, 이해, 애정 등 자신의 전부를 하느님께 바치려고 한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구속 신비와 그 메시지에서 영성적 성장을 위한 기초를 세운다. 묵상으로 더 풍요로운 신앙의 신비에 이르고, 정신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려 노력할 뿐만 아니라(마태 22,37), 마음으로도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할 동기를 찾으려고 한다. 묵상을 끝맺을 때 하느님, 성모님, 어느 특정 성인과 친숙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결심은 자신이 더 열렬히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데 도움이 되도록 깊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②애정기도(愛情祈禱)
마음기도 중에 좀더 진보된 형식을 '애정기도'라 한다. 이 기도에서는 분석을 위한 사색의 부분이 별로 없다. 이 단계에 도달한 사람의 마음과 정신은 하느님 안에 이미 든든하게 뿌리박고 있어 하느님께로 빠르고 쉽게 들어간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비에 관하여 이미 많은 것을 배웠으나 더 깊은 지식과 사랑을 갈망한다. 물론 애정적 요소는 초보자의 기도에도 들어 있다. 그러나 특별히 단순하고 깊은 애정기도는 기도자가 상당히 진보하였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③관상(觀相)
마음기도의 최고 단계는 관상이나, 관상 자체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 관상은 성실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에게 현세에서 내려지는 하느님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최고 단계에 이른 관상기도는 지복직관(至福直觀/하느님을 직접 보는 것을 말함. 이것이 천국의 행복한 상태임)에 도달하기 전에 가질 수 있는 하느님과의 가장 가까운 관계에까지 사람을 인도한다. 관상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풍요한 체험을 주고, 커다란 기쁨과 평화도 가져 온다. 진정한 관상기도일 때 그 기도는 생활 전체가 하느님께만 온전히 바쳐진 것으로 나타난다. 
(3) 합동기도(合同祈禱)
합동기도는 실제로는 하느님께 드려지는 개인 소리기도인데,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큰 소리로 드려질 뿐이다. 합동기도는 다른 사람과 같은 자리에서 바치는 것이므로 개인기도와는 약간 다르다. 각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도에서 보여진 신앙의 증언과 투신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다.
합동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찬미와 관상생활로의 복귀,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자 하는 소망,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자세, 성서를 정신차려 읽고, 관대한 형제애, 교회를 위한 봉사에 공헌하려는 의지를 증진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효과를 간직하자면 노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교만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 전례기도
전례기도는 교회 공동체의 기도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뭉친 하느님 가족의 기도이다. 전례기도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즉 머리와 지체가 함께 드리는 공적 예배이다. 전례기도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자격으로가 아니고 교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하는 것이다. 개인기도는 예배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리도록 도와준다. 반면에 교회의 공적 전례기도는 개인기도의 주축이 된다. 그러므로 개인기도와 전례기도 중 어느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미사, 성사, 성무일도, 공식 예배는 교회 전례의 일부이다. 전례에서 중요한 것은 내적인 것으로 이것은 외적인 행동과 말의 진실성을 보장하는 요소이다. 그렇지 못하면 종교는 의미와 내용이 없는 단순한 형식에 불과하다. 마음과 정신이 완전한 삶을 추구하면서 하느님께로 향하지 않을 때 하느님을 제대로 공경할 수 없다. 
(1) 미사(MISSA)
그리스도교적 모든 전례 중에 첫째이자 그 핵심이 되는 것은 주님이 최후만찬 중에 세우신 성찬 제사 즉, 미사이다. 미사는 바로 이 최후만찬을 재현하면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돌아가심 그리고 부활의 신비를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재현한다. 미사 예식에는 중요한 두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말씀전례'와 '성찬전례'이다. 미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31장에 나온다. 

(2) 성무일도(시간전례)
교회의 전례행위 중에 성무일도가 있다. 성무일도에는 말씀기도, 아침기도, 낮기도, 저녁기도, 밤기도 혹은 끝기도가 있다. 성무일도에는 시편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주로 성서귀절이 많다. 그리고 전례주년과 성인들의 축일의 주기적 변동에 따라서 매일 새로운 기도 형태가 있다. 성무일도는 전교회적인 것이므로 평신도들을 포함하는 모든 신자들은 성무일도 특히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에 참여하라고 초대되었다.

(3) 교회 전례기도의 특성
교회의 전례기도에는 여러 가지 특성이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전례예배의 최고 집전자이시다. 성품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결합한 이들이 전례 집행을 지도한다. 전례는 언제나 공동체적 성격을 갖는다. 즉 전례는 교회의 신자들을 단합시키고 그들의 참여를 요청한다. 전례를 변경시킬 권한이 없는 사람이 신비체의 기도를 변경시켜서는 안된다. 전례는 교회 전체에 속하는 것이지 개개 집행자나 전례 안에 특수역할을 맡은 사람들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기도 습관의 교육 
부모들이 기도를 잘 배우도록 자기 자녀들을 배려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기도에 관한 교육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될 때 그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에게 자연스럽게 기도할 것이다. 아침 저녁과 식사 때에 기도하는 습관과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어린이들도 따라서 하도록 해야 한다. 

28장  파스카 신비와 성사생활



1. 그리스도의 현존 

<요점정리> 

▨ 그리스도는 어디에 현존하시는가?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전례 안에, 전례를 드리는 사제의 인격 안에, 신자들이 모여 공동기도를 바칠 때, 성서의 말씀 안에 현존하신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례 안에 현존하신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교회 안에 특히, 전례행사 안에 항상 현존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미사성제에 있어서 특히 성체 형상 안에 현존하시지만, 사제의 인격 안에도 현존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사 안에서 그 능력으로써 현존하시기 때문에 누가 세례를 줄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례를 주시는 것이다"(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7).
그리스도는 당신의 지체들이 모여서 공동기도를 바칠 때에도 현존하신다. 이때에 인간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하나된 백성들과 하느님이 맺으신 계약으로 둘러싸인다. 예배에는 공동체 전체가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참여자로서 협조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당신 말씀에도 현존하신다. "교회에서 성서를 읽을 때 말씀하시는 이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전례헌장 7). 

2. 파스카 신비 

<요점정리> 
▨ 파스카 신비란 무엇인가?파스카 신비란, 좁게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말하나 넓게는 그리스도의 강생으로부터 그분의 재림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신비를 말하며, 파스카 신비의 목적은 인간에게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다.
교회의 전례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계속적으로 재현하며, 따라서 파스카 신비는 교회 전체의 중심을 이룬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을 "파스카 신비 곧 당신의 복된 수난과 죽은 이들 가운데서의 부활과 영광스러운 승천으로써 완성하셨다. 이렇게 친히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죽음을 이기시고, 친히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되찾아주셨던 것이다"(전례헌장 5).
파스카 신비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구속 계획의 중심이다. 그리스도가 중심이며 정점을 이루는 이 계획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완성된 것이며, 인간의 역사에서 점차로 밝혀지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에페 1,10)때에 완성된다. 그로 인해 벌거벗고 십자가형을 받은 종은 이제 아론을 대신하여 멜키세덱의 제도를 따른(히브 7) 인류의 대사제로 등장하였다(히브 8,1-8). 

3. 성사(聖事

<요점정리>  
▨ 성사란 무엇인가?성사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은총을 교회를 통하여 인간에게 전해 주실 때 사용하는 눈에 보이는 표지들로서, 짧게 말해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 주는 외적 표지이자 그 도구이다. 
▨ 성사는 몇 가지가 있는가?세례(洗禮), 견진(堅振), 성체(聖體), 고해(告解), 병자(病者), 성품(聖品)과 혼인(婚姻)성사로서 모두 일곱 가지가 있다.
'성사'라는 말은 '신비'(mysterion)라는 그리스어에 해당하는 라틴어 사끄라멘뚬(Sacramentum)에서 온 말로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얻어진 풍요한 은총과 진리를 교회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실 때 사용하는 눈에 보이는 표지들을 가리킨다. 신약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일곱 가지 성사가 있다고 교회는 선언한다. 그 일곱 가지 성사는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이다
각 성사는 물, 빵, 포도주, 기름 등과 같은 물질과 사람의 몸짓이 결합하여 표지를 이룬다. 그런 물질적 요소가 신앙의 표지가 되고,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의 도구가 된다. 성사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전례 행위를 통해서 성사로써 상징되는 은총을 실제로 주시는 데에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이와같이 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실을 표지로써 나타내는 것이고, 우리는 각 성사가 지니는 고유한 뜻을 표현하는 표지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받게 된다.
성사는 그리스도의 선물이며, 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인간성에 적용된 표현 양식을 사용하면서 하느님의 힘을 행사하신다. 성사로써 그리스도는 모든 지역의 사람들에게 손을 뻗치신다. 그리스도의 성사적 행위는 당신의 모든 약속이 채워질 때까지 어디서나 계속될 것이다. 모든 성사적 예식에서 우리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주님의 돌아가심과 부활과 승천의 신비에로 인도된다. 

4. 성사가 유효하기 위한 조건
성사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성사는 신앙의 표지이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행위이므로, 그리스도가 지정하여 교회에 맡긴 표지 외의 다른 것을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물질적 표지가 가지는 효력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배려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사 집행이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가 되려면 교회 안에서 성실히 이행되어야 한다.
성사는 거룩한 행위이므로 집행자는 큰 신앙과 사랑을 가지고 거행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늘 가르쳐 온 것처럼 성사의 유효 여부는 집행자의 성덕에 달려 있지는 않다. 성사의 효력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오고, 성사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사를 효과있게 받기를 원하는 성인(成人)에게는 신앙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은총을 받을 개인적 원의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전례는 주님의 돌아가심과 부활을 기념하고 선포한다. 신자들이 전례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완전히' 참여하기를 교회는 원한다. 그러므로 성사의식은 기계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믿음과 기쁨을 가지고 집행되어야 한다. 

5. 준성사(準聖事

<요점정리>  
▨ 준성사(準聖事)란 무엇인가?준성사란, 성사를 모방하여 교회가 하느님께 대한 예배와 봉사를 위한 표지로 사용되는 물건과 행위이니, 악마를 쫓음(구마:'驅魔'), 축성(祝聖), 강복(降福), 성화(聖畵), 성수(聖水)와 같은 것들이다.
교회에서는 성사를 받는 사람에게 그것이 보다 더 효율적으로 집행되기 위해 그 성사에 부속된 예절을 정하고 있다. 이 예절로써 성사를 받는 사람에게 성사의 거룩함과 귀중함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그 마음에 합당한 믿음과 사랑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절이 준성사이다.
그런데 준성사는 성사와 관련된 것도 있지만 성사와 아무런 관련을 가지지 않은 것도 있다. 그 중에 특별한 것은 축성과 강복하는 예절이다. 이렇게 준성사는 성사와는 다르지만 성사를 잘 받도록 우리 마음을 준비시키고 우리의 생활을 거룩하게 하는 효력을 가진다. 따라서 준성사에 의해 축성된 것은 모두 거룩하므로 존경심을 가지고 공손히 취급해야 한다. 그러나 성패, 묵주, 상본 등에 지나치게 의탁하고, 경솔하게 세속적인 일에 사용해서는 안된다. 


29장  세례성사


<요점정리>  
▨ 세례성사를 받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우리가 세례성사를 받으면 원죄를 포함한 모든 죄를 용서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한 일원이 된다. 
▨ 세례성사를 받는 사람은 교회 앞에서 무엇을 약속하는가?악의 경향과 유혹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계명을 지키기로 약속한다. 
▨ 세례성사의 통상적 집전자는 누구인가?주교, 사제, 부제가 통상적 집전자이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비가톨릭 신자를 포함한 아무라도 세례성사를 베풀 수 있다. 
▨ 세례성사의 예식은 어떠한가?이마에 물을 부으면서,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에게 세례를 줍니다"라는 세례경을 외운다.

1.세례성사를 주는 시기 
(1) 부활성야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성탄, 부활, 성모승천 대축일(8월15일)과 그외 각 본당의 사정에 따라 적당한 시기에 세례성사를 베풀지만, 전통적으로는 부활성야, 즉 부활주일 전날 밤이 세례성사를 위한 시기이다.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약 3년간 예비신자로서 교리교육을 받은 후 사순절(부활을 준비하는 부활 전 40일간)에 집중교육을 받고 부활성야에 세례성사와 견진 및 성체성사를 받는다.
사순시기가 초대 예비신자들에게 세례 전 교육기간이었듯이 부활성야는 세례 준비, 세례 서약, 신앙 갱신 준비를 위해 가장 적당한 때이다. 
부활성야 예식은 보통 성당 마당에서 행하는 빛의 예식으로 시작한다. 새 불에서 부활초에 불을 켠다. 부활 촛불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부활초를 들고 성당 안으로 행렬하는 가운데 먼저 주례자, 그 다음에 봉사자, 끝으로 모여 있는 다른 사람들이 파스카 초에서 자기 초에 불을 당긴다. 모두 구세사(救世史)의 절정에 이른 하느님의 빛의 영광 안에 기뻐하면서 부활찬송을 노래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세업적을 기록한 독서를 차례로 낭독한다.
제단 초에 불이 켜지고 대영광송이 시작되면 종이 울린다. 성서에 나오는 구세사를 요약하는 기도로써 물을 축성한다. 부활초가 물에 담구어지면 부활초가 상징하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세대(聖洗臺)는 생명을 주는 것이 된다.
세례 서약을 선언하고 신앙고백이 이어지며 끝으로 세례를 준다. 이렇게 영세자는 하느님의 선민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사제직"(1베드 2,5)에 참여케 된다. 영세한 사람에게 세례의 순결의 표지인 흰 옷을 입히는 것으로서 예절이 끝난다. 영세자는 이로써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축하하고 신앙을 갱신하는 성체성사에 참여할 준비가 되는 것이다. 

(2) 사순절
사순절은 극기와 신앙 갱신의 기간이므로 공동체 전체의 것이다. 사순절은 예비신자의 교육기간이지만 영세자를 위한 시기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모든 신자는 부활성야에 세례 서약을 갱신하면서 세례의 체험을 재생하고, 세례의 이해를 깊게 할 기회를 갖는다.
모든 극기 행위는 세례가 요청하는 완전한 개종,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사랑의 충동 하에 생활 전체를 반성하고 결단하여 재정비하는 완전한 내적 쇄신의 일부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함으로써 타락의 결과를 그리스도의 힘으로 좀더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그리스도교적 극기는 전통적으로 기도, 단식, 자선행위를 포함한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는 대개 단식보다는 충실한 기도와, 자선활동과 연결된 극기를 강조하는 것이 적당하며, 또 필요할지 모른다. 단식과 금육재가 사순절 때에 장려되지만 특별규정은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성 금요일에 단식재를 지키고, 매 금요일에 금육재를 지킨다.
단식재를 지키는 날은 금육재를 겸한다. 금육재 날은 고기를 먹지 않으며, 단식재 날에는 한 끼는 정식으로 하되 두 끼의 식사 때에는 적게 먹는다. 단식재는 만 18세에서 60세까지 지킬 의무가 있고, 금육재는 만 14세부터 죽을 때 까지 지켜야 한다.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 신자들은 이 특별규정에서 면제되거나 관면을 청할 수 있다. 
단식재와 금육재가 극기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 환자, 가난한 자, 비천한 자, 죄수, 실망한 사람, 영세민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임으로써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모범을 생활로 증거해야 한다. 잘 먹던 사람이 단식함으로써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희사는 분명한 사랑의 행위이다. 

2. 세례성사 예식
세례는 지망자를 성세수(聖洗水)에 세 번 침수하거나, 아니면 그의 이마에 물을 세 번 부으면서 집행할 수 있다. 위급한 경우 사도신경을(이것도 급하면 생략할 수도 있다) 바치고 세례경을 외우면서 세례받을 사람 위에 물을 부으면 충분하다. 물을 사용하면서 주례자는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말한다. 위급할 때에 세례받은 어린이는 병이 완쾌되면 보례(보충 예식)을 받아야 한다.
각 세례 지망자는 여자의 경우는 대모(代母: 영적 어머니)를 남자의 경우는 대부(代父: 영적 아버지)를 정해야 한다. 대부모는 성숙한 사람으로서 신앙생활을 하며, 영세자를 영성적으로 보살피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보통으로 어느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세례 때에 지어준다. 물과 세례경은 영세자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면서 영위하도록 불리운 삼위일체의 새 생명임을 상징한다. 

3. 세례의 집전자
주교, 사제, 부제는 세례의 통상 집행자이다. 누구든지, 심지어는 비가톨릭 그리스도인이라도 교회의 정신에 따라 신중한 의도를 갖고 세례예식을 이행하면 세례성사를 유효하게 집행할 수 있다. 정상적으로 세례를 베풀 수 없는 위급한 경우 모든 가톨릭 신자는 세례성사를 줄 줄 알아야 하며, 이렇게 세례를 베푼 경우에는 즉시 이 사실을 가까운 본당 신부에게 알려야 한다. 

4. 세례의 주요 효과
"세례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아 함께 묻히는 것이다"(어린이세례예식서 6). 성세수는 우리의 죄를 씻어버리고 우리를 새 생명의 길에 올려 놓는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은총은 용서하고 치유하는 효과를 낸다. 따라서 세례는 원죄를 사하며, 유아기가 지나서 영세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지은 개인적인 죄도 모두 사해진다.
세례 때에는 하느님의 특사(特思)로써 죄의 용서를 받는다. 원죄가 사해져도 원죄의 결과와 죄악에로의 경향은 남아 있다. 죄에로의 경향이 남아 있어 우리는 그것과 투쟁해야 하나, 이 경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그 경향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 노력하는 사람을 해칠 수 없다. 이 투쟁, 즉 우리 욕망과의 고통스러운 투쟁은 예수님의 죽음에 평생을 두고 참여하는 것이다. 
영세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서만 그분과 함께 죽는다. 세례는 우리를 교회의 성원이 되게 한다. 교회의 성원이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포도나무에 접목되어(요한 15,4-6) 그리스도의 몸에 깊이 결합되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과 함께 물로 씻는 세례는 사람들을 하느님 본성에 참여케 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준다"(어린이세례예식서 5).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이며 동시에 새로운 출생이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자녀는 부모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어떤 양식이든간에 하느님의 본성과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 틀림없다.
베드로 일서의 대부분은 세례와 세례의 효과와 뜻에 관한 묵상이다. 성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정신과 진리에 있어 하느님의 사제가 되게 하는 세례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백성입니다"(1베드 2,9-10). 

5. 어린이 세례(幼兒洗禮)
"이해도 못하고 개인적 투신도 못하는 어린이에게 왜 세례를 주는가? 부모가 어린이의 종교를 결정하여 선택의 자유를 없애거나 감소시키는 것은 부당하고 지각없는 것이 아닌가?" 교회법은 가톨릭 신자는 자녀가 출생 한 후 되도록 빨리 세례를 받게 하라고 명한다.
그리스도교의 거의 시초부터 전가족이 세례받을 때에 어린이 세례도 실시되었다. 예수님 자신이 어린이 세례의 신학적 이유를 제공하였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부모가, 특히 자기의 개종이 깊은 영성적 체험이 될 때에 그 체험에 자기 자녀들도 참여시키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자기 자녀들도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고, 자녀들의 전생활이 최후의 목표이고, 최상의 선이신 하느님께로 지향하기를 고대하지 않겠는가? 

6. 세례의 종류와 구원 문제
교회는 복음 말씀을 따라(요한 3,5) 세례받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는 그리스도나 세례에 관하여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은 구원될 수 없음을 뜻하는가?
세례에는 물의 세례(수세·水洗)만이 아니라, '피의 세례'(혈세·血洗)와 '열망의 세례'(화세·火洗)도 있다. 피의 세례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받는다. 열망의 세례 범위는 넓다. 세례받기를 분명하게 원하였으나 그 바람이 이행되기 전에 죽은 사람은 열망의 세례를 꼭 받는다. 명확하게 혹은 묵시적으로 세례를 열망하였으나, 어떤 사정으로 세례성사를 받지 못한 사람도 분명히 열망의 세례를 받는다. 자신의 과오없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알지 못한 사람들도 선한 생활을 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만인에게 충분히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교회헌장 16)에 대한 반응이었다면 그들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칠 수 있다. 그들은 묵시적이지만 세례를 원하므로, 그것을 열망의 세례라 한다. 

7. 세례와 성령의 인호(印號)
세례성사는 견진성사와 성품성사와 마찬가지로 영구적 인호 혹은 표징을 박아준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다른 성사는 한 번 이상 받을 수 있으나 세례, 견진, 성품성사는 한 번밖에 받지 못함을 뜻한다. 이 성사를 받은 사람이 대죄를 범해도, 이 성사의 결과는 존속되고 영구히 남아 있음을 뜻한다.
성 바울로는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이미 우리에게 도장이 찍혔다고 한다.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복음 곧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표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약속하셨던 성령을 주셨습니다"(에페 1,13). 
사제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충분히 참여하고, 그분의 제사를 어디서나 재현하도록 서품을 받았듯이 모든 신자는 세례로써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기본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의무가 지워지며, 그리스도의 제사와 일치하여 자신들의 생활 전체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다. 실패해도 그들은 세례를 다시 받지 않고, 고해성사로써 교회와 화해한다. 세례 인호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리스도인의 영구적 소명의 표징이고, 또한 하느님의 자발적이고 물리칠 수 없는 사랑의 표징이다. 

 제 10편
30장  견진성사

<요점정리>
▨ 견진성사를 받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우리는 견진성사로 성령의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세상에 증거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된다. 
▨ 견진성사 때 주교가 견진자의 이마에 바르는 기름(크리스마 라고도 불림)은 무엇을 뜻하는가?구약시대에 예언자, 왕, 사제에게 기름을 부어 세운 전통에 따라, 성령의 상징인 기름을 받는 견진자는 이제 하느님의 예언자, 왕, 사제가 되어 세상에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드러내고 전하는 자가 됨을 뜻한다.

1. 견진성사의 기원
성체, 세례, 고해성사에 관한 뚜렷한 가르침은 복음에 있으나 견진성사에 관한 가르침은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서에서 견진성사에 관한 말, 즉 기름 바르는 예식에 관한 말이 나온 때는 그리스도는 이미 승천하신 후였다. 

2. 견진성사 기름(크리스마)의 뜻
원래 견진성사 때 사용되는 올리브 기름은 대개 고대세계에서처럼 팔레스티나에서도 값진 물품이었다. 용도가 다양한 만큼 의미도 풍부하였다. 아론은 도유(塗油)를 받아 대사제가 되었고, 그의 아들들도 그랬다(레위 8,12.30). 후에 사무엘은 사울을 도유하여 왕으로 세웠고, 다윗에게도 그랬다(1사무 10,1;16,13).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이 도유받음으로 성령을 받고, 비범한 결과를 내었다. 즉 사울은 예언하게 되고, 주의 성령은 다윗에게 급히 다가갔다. 이렇게 해서 기름은 사도들에게 처음으로 보내진 은총의 참여이며, 성령의 오심을 상징하게 되었다. 

3. 성령의 성사로서의 견진성사
견진성사는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안수와 크리스마 성유(聖油)를 바름으로써 성령강림 일에 받은 성령의 은총을 전교회와 모든 회원들에게 전달하는 성사이다. 견진은 전세계로 향하고, 교회 안에서 영구히 재현되는 성령강림이다. 견진은 그리스도의 나라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하라는 부르심이다. 

4. 견진성사 집전자
견진성사로써 완전히 교회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게 되는 까닭에, 한 지방교회의 우두머리인 주교가 견진성사를 베푸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정에 의해 교회가 위임하면 어느 사제든지 견진성사를 집행할 권한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통상적으로 주교만 성사를 집행하도록 하고 있다. "사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진 후에 안수(按手)를 함으로써 신자들에게 성령을 주었다. 이렇게 주교의 집전을 통해서 성령을 받을 때에는 견진자를 교회와 또한 사람 속에서 증인이 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결합시키는 깊은 유대가 드러난다"(견진성사예식서 7). 

5. 세례와 견진
교회 초기에는 세례 직후에 견진성사가 집행되었다. 세례는 재생이고 새로운 창조이지만, 성령으로써 완성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아직도 지도, 격려, 용기, 성장을 더 필요로 한다. 교황 바울로 6세는 "신자들은 세례성사로써 재생하고, 견진성사로써 강화되며, 성체 안의 영생의 음식으로써 유지된다"고 가르쳤다.
어른이 세례를 받는 경우, 세례 집전 사제가 즉시 견진을 베푸는 것이 교회의 오랜 전통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주교회의에서 사목적 이유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주교가 견진성사를 베풀도록 규정한 까닭에 어른 세례자라 할지라도 다시 얼마간의 시간을 두고 교육을 받은 후에 주교로부터 견진을 받는다.
라틴 예식에 속하는 견진성사 예식서는 어린이들에 관해서 "견진성사의 집행이 보통으로 만 7세까지 지연되지만, 사목적인 이유에서 좀더 성숙한 연령에까지 지연되는 것을 허락한다"(견진성사예식서 11)고 하였다. 많은 곳에서는 사춘기 초기까지 견진성사를 연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교적 생활 전체가 재출생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어른 단계로 나아가는 것으로 본다면(에페 4,13), 견진성사가 사춘기에나 더 늦게 집행되어도 아직도 입교의 성사로 보는 데에 큰 지장이 없다. 

6. 성장의 성사
견진성사는 성장을 의미하며, 견진자가 성장하도록 요구하는 계속적 도전이다. 이 성장을 위해서도 생명이 요구되며, 견진자는 은총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견진은 순간적 성장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고, 또 즉각 성장을 위한 것도 아니다. 견진은 한 사람에게 한 번만 주어지고, 영구적 결과를 내는 성사 중의 하나로서 영구적 인호를 준다. 

7. 견진성사의 효과
견진성사는 교회와 신자들의 생활 안에 성령강림을 영구화하는 성사이다. 성령은 하느님의 무한한 선물이며, 그것을 받는 사람은 "성령이 계신 성전"(1고린 6,19)이 된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성장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라고 하셨다. 견진으로써 성령의 특별한 힘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전파하여 옹호할, 보다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된다"(교회헌장 11). 현세에서의 사도적 임무를 위한 평신도의 소명과, 지상에 천국을 건설할 평신도의 역할이 견진성사와 관련된다. 

8. 견진성사 효과의 근원
견진성사는 다른 모든 성사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인 파스카 신비에서 효력을 받는다. "보통으로 미사 중에 견진성사가 집행되는 것은 이것을 의미한다"(견진성사예식서 13). 견진성사가 미사와 떨어져서 집행되어도, 그것의 원천은 역시 파스카 신비이다. 크리스마 성유(성 목요일에 주교가 축성한, 견진성사 때 사용되는 기름)도 견진자가 이 신비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주님이 받은 도유를 상기시킨다(마르 1,11). 


31장  성체성사


<요점정리>  

▨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세우셨는가?그리스도는 세상 마칠 때까지 교회로 하여금 십자가의 제사를 계속하고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가운데 당신의 구원 사업이 계속 이어지고, 당신 자신이 우리와 일치하는 가운데 우리끼리도 서로 하나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1. 교회 생활의 중심인 성체성사 


<요점정리>  

▨ 성체성사는 무엇인가?
성체성사는 교회의 일곱 성사 가운데 으뜸되는 성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의 재현을 뜻하기도 하고(제사로서의 미사), 영적 생명으로 우리에게 넘겨 주신 당신의 몸과 피(성체와 성혈)를 뜻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중심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그분에게 속한다. 성체는 단순히 상징이나 예식이 아니라 인간이 예수님의 구속활동과 하느님의 은총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성사이다. 바로 이 이유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중심이고 절정이다.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존하시고, 성체는 교회 안에 파스카 신비를 재현하므로, 성체성사는 교회의 모든 직무와 사도직의 "원천이고 절정"(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5)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할 뿐 아니라, "자신과 노동과 모든 피조물을 그리스도와 함께 봉헌하도록 불리우고 인도된다"(직무 5). 

2. 성체성사와 구약의 파스카 잔치
구약성서에 나타난 많은 제사에서 거룩한 잔치가 예배의 한 요소였으며 제사를 드리는 가운데 나누어 먹음으로써 하느님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노아(창세 8,20)와 아브라함(창세 15,9)의 경우에도 음식을 바치는 제사 가운데 하느님과의 계약이 맺어진다. 그 후 그들의 후손들이 이 계약 준수를 거절해도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출애굽(이스라엘이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한 사건)을 통하여 구약에서 가장 큰 계약을 시나이산에서 맺으셨는데, 이러한 과정 가운데 잔치(음식을 나눔)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출애 12,3-5.11-14.17).
이렇게 식사는 해방이라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에집트에서 탈출하기 전 가족 단위로 음식을 나누었던 사건이 출애굽 사건 전체를 드러내 주는 상징으로 여겨져, 하나의 예식이 되어 대대손손 전해지게 되었는데, 이를 파스카 잔치라고 한다.
에집트로부터의 구원사건 전체가, 파스카 양과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나누어 먹는 의식으로 이루어진 파스카 잔치 예식을 통하여 계속 기념되었다. 이 잔치 때에 하느님의 백성은 자기들이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주님과 맺은 계약을 갱신하였다. 예수님 자신도 최후만찬 때 이 파스카 예식을 행하신 것으로 보인다.

3. 예수의 최후의 만찬: 성체성사를 세우심 


<요점정리>  

▨ 예수께서는 언제 성체성사를 세우셨는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최후만찬을 하시던 중에 성체성사를 세우셨으니, 빵과 포도주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로다"라고 선언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예식을 계속 행할 것을 명하셨다.
사람들에게 붙잡혀 돌아가시기 전에 베푸신 최후만찬 때에 주님은 새로운 기념 제사를 세우셨다. 먼저 예수님은 파스카 예식을 거행하셨다. 이 거룩한 밤에 예수님은 다가올 새 선물에 관해서 말씀하셨고, 과거의 보배는 새 선물의 그림자나 모형에 불과했다고 하셨다. 그분은 새 계약의 규정을 선포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
저녁식사 도중에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먹는 예식을 하다가 예수님은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하고 말씀하셨다"(마태 26,26). 그분은 포도주가 든 잔을 들고 감사를 드리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루가 22,20). 끝으로 그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1고린 11,24)라고 명령하셨다.
파스카 잔치와 마찬가지로 새 계약을 이루는 이 기념 제사(미사)도 제사인 동시에 거룩한 식사이다. 십자가의 제사를 피흘림 없이 재현하고, 그 제사의 구속 은총을 적용하는 미사성제에서 주님이 희생으로 바쳐진다.

4. 초대교회의 성찬례(미사)
초대 교회생활을 기록하던 당시의 교회저자들은 성찬예식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으니, 성찬이 공동체의 기본적 행사였고,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가장 잘 표시하고 보존하였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서 성 루가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 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던"(사도 2,42) 예루살렘의 새로운 신자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던 초창기에 신자들은 보통 이웃에 있는 유다인 회당에서 행하던 성서 중심의 예식에 참석하고, 시간과 장소를 따로 정하여 서로의 집에 모여서 주의 만찬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복음과 새로운 생활이 그리스도교적 공동체 생활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사도 2,43-47).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성서 독서의 계획표와 기도문을 작성하였고, 오래지 않아 그것들은 기념제사 식사와 합류되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말씀 전례와 성찬 예식의 병합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지내는 성찬예식에도 계속 남아 있다. 

5. 미사(성찬례


<요점정리>  

▨ 미사(성찬례)란 무엇인가?미사는 십자가 위에서 바칠 제사를, 예수께서 최후만찬 때 식사의 형태를 빌어 행하신 것을 재현하는 제사이니, 이를 통하여 교회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면서 그분의 구원 사업을 계속 이어나가는 동시에, 미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네주시는 당신 몸과 피로 영적 음식을 취한다.
미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특히 십자가 위에서 바치신 제사를 성사적으로 거행한 최후만찬의 재현이다. 따라서 미사는 십자가 제사이자 파스카 잔치이다.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시는 것은 아니지만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십자가 위에서 한 번만 봉헌된 피흘린 제사가 재현되고, 그것의 기념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보존되어, 거기에서 나오는 구원의 힘이 우리가 매일 범하는 죄악을 용서한다.
십자가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사에서도 예수님이 성부께 끝없이 무한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주례 사제이며 제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사에서는 교회가 예수님과 공동으로 제사를 지낸다. 교회는 자신을 예수님과 함께 합쳐서 봉헌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제와 제물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1) 미사의 구조
미사는 크게『말씀전례』와『성찬전례』로 나눌 수 있다. 미사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① 시작예식(始作禮式)
      사제가 제대 앞으로 나옴
              - 입당 - 인사 - 참회 - 자비송 - 대영광송
              - 본기도(그날 미사의 주제가 드러남)

   ②말씀전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시간
              - 제1독서(보통 구약에서 뽑으며, 그날 복음과 관계되는 구절)
              - 화답송(성서의 시편으로서, 방금 들은 말씀에 대해 감사, 찬미드림)
              - 제2독서(복음을 제외한 신약에서 뽑음)
              - 복음 환호송(알렐루야는 '하느님을 찬미하라' 라는 뜻으로,

      복음을 듣기 전에 백성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환호임)
              - 복음 - 강론 - 신앙고백 - 보편지향기도

   ③성찬전례
      주님의 최후만찬을 재현하면서 십자가 제사를 기념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면서 봉헌노래를 부르고 미사예물(헌금) 을 바침
              - 예물기도 - 감사송 - 거룩하시도다 - 감사기도 - 주의기도
              - 평화 예식 - 빵 나눔 - 하느님의 어린 양 - 영성체 전 기도 - 영성체 - 감사침묵기도
              - 영성체 후 기도

   ④마침 예식
      파견
              - 강복 - 파견 


(2) 제의(祭衣)의 색(色)
미사 중에 사용되는 색은 5가지가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
흰   색 : 무죄함과 환희, 부활의 상징으로서 순교하지 않은 성인들, 성모, 천사 축일과 부활, 성
              탄 시기에 사용.
붉은색 : 피(순교)와 사랑을 상징하며, 성령, 순교자 축일에 사용.
녹    색: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그리스도교의 희망을 상징하며 대림, 성탄, 사순, 부활시기가 아
              닌  연중시기에 사용.
보라색 : 참회와 겸손의 표시로서, 대림시기, 사순시기에 사용.
검은색 : 죽음을 상징하며 장례미사 때 사용.
이밖에 흰색 대신 노란색을 사용하기도 하고, 대림 제3주일과 사순 제4주일에 참회 가운데 기쁨을 드러내기 위해 장미색을 사용하기도 한다. 

6. 미사지향과 미사예물
사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만인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 백성의 여러 가지 요구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 안에서 성부께 미사를 봉헌한다. 하느님만이 이 완전한 숭배와 찬미를 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제사는 하느님에게만 봉헌된다. 미사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만인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총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지내는 것이다.
신자들이 자기들의 특별 지향, 죽은 이의 영원한 안식, 어떤 영신적인 또는 현세적 필요, 하느님께 감사의 표시 등을 위하여 미사를 드려달라고 청한다. 이런 청을 할 때에 보통으로 금전적 기부를 한다. 이 미사예물은 그것을 바치는 사람이 미사성제에 좀더 깊이 참여하고자 한다는 원의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미사예물의 봉헌자는 미사성제에 자신의 제물을 첨부하면서 교회와 사제들의 생활을 경제적으로 돕는다. 결국 미사예물을 빌미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신앙 자세라 할 것이다. 

7. 교무금과 주일미사예물(헌금)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자기가 번 돈의 일부(원래는 십분의 일을 바쳤다)를 교회에 바칠 뿐만 아니라, 교회의 활동을 경제적으로 돕고 사제의 생활을 위해 돈을 희사하게 된다. 교무금(敎務金)은 각 신자가 교회(일반적으로 본당 신부)와 협의하여 매달 얼마씩 내겠다고 약속한 금액이며, 이외에도 매번 미사에 참석할 때마다 감사헌금이나 교회의 특별 활동(예: 성전 신축기금)을 위한 헌금을 한다.
이 모든 헌금 행위는 자기가 번 돈은 자기가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며 따라서 모든 재물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는 공동체적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8. 미사의 집전자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1고린 11,24)라고 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셨다. 미사를 지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품성사를 통하여 부르시고 날인하여 당신의 대리자로 행동하도록 권한을 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도에 따라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주교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축성의 말을 할 때에 신약의 제사가 재현되어 신자들이 참석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신자들도 자신들의 "왕다운 사제직"(1베드 2,9)의 힘으로 봉헌에 참여한다. 신자들이 영성체를 함으로써 또한 "사제의 손을 빌어서 제물을 봉헌할 뿐 아니라 그 제물을 사제와 함께 봉헌하며, 자기 자신도 제물로 봉헌하면서"(미사경본2, 서론 62), 신비체의 지체로서의 직책을 완전히 이행함으로써 봉헌에 참여하는 것이다. 

9. 영성체(領聖體


<요점정리>  

▨ 성체와 성혈은 무엇인가?
성체와 성혈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교회는 미사 중에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이는 내 몸이요", "이는 내 피니라" 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선언을 받아들여 성체와 성혈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고백한다.
성체성사(성체와 성혈)를 받는 것을 영성체라고 한다. 영성체는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리스도 자신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형제자매들과도 친밀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먹으면서, 말씀전례 때 들은 하느님의 말씀(말씀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다!)대로 살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보통 경우에는 하루 한 번만 영성체를 한다. 그러나 어떤 특정 경우에는 하루에 두 번 영성체하는 것을 허락한다. 성체만 영하거나 성체와 성혈을 모두 영하거나 상관없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우리 안에 모시게 된다. 그리스도는 성체와 성혈 모두에 온전하게 현존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영성체를 얼마나 자주 해야 하는지에 관한 하느님의 법은 없다. 교회는 신자들이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사순절 시작과 부활시기의 끝 사이에 영성체 하라고 명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히 성체를 자주 받아 영하여서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깊게 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주 혹은 매일이라도 미사에 참여하고 영성체를 하라고 신자들에게 권고한다(교회헌장 42).

10. 영성체 준비
성체성사를 합당하게 받자면, 영세한 가톨릭 신자로서 은총 지위에 있고 성체에 관한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 대죄를 범했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영성체 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대죄를 범한 사람이, 영성체를 해야 할 긴급한 사정이 있으나 고해성사를 볼 기회가 없으면 영성체 전에 완전한 통회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후에 기회가 오면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신약성서는 영성체를 합당하게 할 중대한 의무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1고린 11,27-29).
우리가 영성체하기 전에 한 시간 동안 음식과 술을 먹지 말 것을 교회는 명한다. 이 공복재(空腹齋)는 성체로써 우리가 받는 그분에 대한 외적인 존경의 공동표시이고 참회하는 준비이다. 환자와 노인에게는 15분의 공복재로 넉넉하다.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에게는 공복재가 필요없다. 또, 물을 마시거나 약을 먹는 것은 허용된다.

11. 영적 음식으로서의 성체성사
성체성사의 가장 자명한 표징은 음식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파스카 잔치에서 사용되던 음식은 구약시대의 팔레스티나 지방의 주식이었다. 서방교회에서는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최후만찬에서 쓰였기 때문이다. 성 바울로는 누룩 섞이지 않은 빵을 순수성과 새로움의 상징이라고 보았다(1고린 5,6-8).
포도주가 사용되는 미사에는 음식의 상징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최후만찬 때에 먹고 마시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음식을 상징하고 있는 것과 잘 맞는다.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요한 6,35.55). 

12. 일치의 성사
성체성사는 교회의 일치를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빵과 포도주가 그 자체로 일치의 상징이다. 많은 밀알이 모여서 빵을 이루고, 많은 포도알이 모여서 포도주를 이루듯이 하느님의 가족이 모여서 하나가 된다. 공동체가 빵을 나누어 먹는 그 자체가 일치를 상징한다. 성체성사는 "교회의 단일성을 표시하고 동시에 실현한다". 사랑이 주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일치를 이룩한다.
영성체가 강조하는 일치는 우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일치인 것이다(요한 15,4).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하여, 우리는 서로 함께 뭉치고 사랑의 활동을 통해서 서로를 위한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된다. 성체성사가 세 번째로 상징하는 것은 우리의 천상 유산이다. 성찬예식 전체는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신자들의 공동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하느님의 옥좌 주위에 모여서 하느님 자신을 영원한 보상으로 받을 것이다.
미사참례는 우리를 지상의 살아 있는 교회와 일치시킬 뿐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신앙으로 표시되어 우리보다 먼저 죽은 이들과도 일치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성제를 봉헌하며, 모든 성인들과 결합함으로써 천상의 예배하는 교회에 매우 밀접히 일치하는 것이다"(교회헌장 50). 

13.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성체 안에 빵과 포도주의 외형 아래 예수님이 현존하신다는 교회의 신앙은 요한 복음에 기록된 예수님 자신의 설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요한 6,22-71). "나는 생명의 빵이다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48.51). 어떤 사람들은 이 약속이 믿기에 너무 어렵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불신자들이 떠나갔어도 예수님은 당신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셨고, 당신 말씀에 대한 불신자들의 이해를 바꾸려 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 놓고, 당신은 실제로 시적으로나 비유적으로 말씀한 것이라고 해명하지도 않으셨다.
성체 안의 경이스러운 현존 양식은 독특하다. 교회가 믿고 기도하고, 자선사업과 신앙의 활동을 할 때에, 교회의 주교와 사제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백성들을 다스리고, 성사를 집행할 때에,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러나 미사 때에 이루어지는 성체성사 안에 예수님의 현존은 참된 현존이라고 묘사될 만큼 특별한 성격을 갖는다. 다른 여섯 가지 성사는 신자로 하여금 활동하시고 은총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상봉하게 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성체성사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사제가 예물을 들고 봉헌의 말을 했을 때 빵과 포도주는 없어지고, 그때부터 우리 앞에 놓여있는 빵과 포도주의 형체 안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몸과 피인 것이다. 예수님은 영성적으로 당신의 지식, 관심, 활동으로서만 현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방법으로, 전체적으로, 하느님이며 사람으로서, 실제적으로 또 영구히 현존하신다. 봉헌 후에 빵과 포도주의 외형이 남아 있는 한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계속 현존하신다. 

14. 성체 신심
교회의 초기에 성체를 보존하던 중요 이유는 전례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 특히 환자와 죽어가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영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주님의 성체를 존경스럽게 모셔가곤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안에 성체에 대한 신심은 깊고 넓혀져 갔다.
성체성사가 있는 곳마다 우리의 주님이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그래서 이 성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어디서나 예배드려야 한다. 성체에 대한 예배는 무릎을 꿇거나 절하기, 성체조배 등 여러 가지 방법과 여러 가지 신심 행위로써 표현된다. 13세기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성인들의 힘으로 성체 대축일이 제정되었다. 가끔 성체를 보통으로 모셔두는 감실에서 제대 위로 모셔 내놓고 조배하는 방법(성체현시)도 있다. 


 제 11편
32장  성품성사

<요점정리>

▨ 성품성사란 무엇인가?성품성사란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계승하여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고 복음을 선포하도록 교회 안에 주교, 신부, 부제를 세우는 성사로서, 이 성사를 통하여 이들 성직자들에게 필요한 은혜가 베풀어진다. 
▨ 그리스도는 왜 성품성사를 세우셨는가?그리스도는 성직자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고, 거룩한 제사(미사)를 바치며, 하느님의 백성을 지도하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그의 구속사업이 계속되도록 성품성사를 세우셨다.

1. 성품성사의 기원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던 최초의 성목요일에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시오"라고 하시면서 사도들에게 성품을 주셨다. 성품성사는 그리스도의 의도와 최초의 성목요일에 하신 예수님의 분명한 행동과 말씀에 그 기원을 둔다.
성품성사와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파스카 성제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사제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을 바치셨다. 그런데 성체는 그 제사를 계속적으로 재현한다. 사제직은 하느님의 이 사업에 인간이 특별히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로운 사제직은 볼 수 있고 외적인 사제직이다. 우리 구세주 주님이 이것을 제정하셨고, 당신 몸과 피를 축성하여 봉헌하고 집행하는 권한을 사도들과 그들의 후계자에게 주셨다고 성서가 보여 주며, 가톨릭 교회의 전통도 항상 가르쳐 왔다. 

2. 사제직(司祭職)
사제로 성품되는 사람은 세상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표징이 된다. 사제는 그리스도와 긴밀히 일치하므로 사제직은 그의 실존의 영구적 부분이 된다. 사제직은 하느님의 물릴 수 없는 선물이다.
성품성사를 받을 때에 사제는 "새로이 하느님께 축성되었고" 그들은 "영원한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산 연장이 되어, 천상 효력으로써 온 인류사회를 재건하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업을, 세기를 통하여 계속할 수 있게 된다". 사제직은 기름발리움으로써 특별한 영적 인호가 새겨지고, 이로써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리로 행동할 수 있도록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된다.
그리스도는 사제 안에서 여러 모습으로 사시고 행동하신다. 사제가 그리스도와 일치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영속시키는 유일한 힘을 형성할 때에 표현된다(교회헌장 10). 사도들의 본질적 활동은 복음의 선포, 공동체의 구성과 지도, 죄의 용서, 병자의 도유, 성체성사의 거행, 인류를 구원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그리스도의 사업의 연장 등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사제직에 성품된 사람들은, 성화하고 가르치고 다스린다. 사제의 모든 존재와 활동의 원천은 그리스도이시다. 사제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당신의 사제생활과 활동을 현세에서 계속 실현한다. 

3. 항구한 사제직
사제직의 축성은 없어지지 않는다. 한 번 사제로 성품되면 그 사람은 영원히 사제이다. 한 사제가 어떤 이유로든 직무 행사에서 면제되거나 해임되어도 그리스도의 사제직에의 이러한 특별 참여관계는 없어지지 않는다. 사제직의 영구성은 사제가 성품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양식에서 나온다.
그래서 성품성사는 '종말론적 표징',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나라가 올 것을 가리키는 표징이다. 사제가 자신을 자유로이 바치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완전히 실현될 날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인호를 받고 사제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활동할 힘을 얻고, 그리스도의 최상 권한에서 나오는 필요한 권한을 받는다. 

4. 보편사제직과 직무사제직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분의 신적 생명과 사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보편사제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품성사는 사제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명에 독특한 방법으로 참여하게 한다. 성품은 성품받은 이를 그리스도의 진정하고 권위있는 특별한 대리자로 만든다. 최후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직분상의 사제직을 별개의 성사로 제정하셨기 때문에 성품받은 이의 사제직은 신자의 보편사제직과 다르며 구분된다.
세례성사를 받은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교, 사제, 부제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들이 특별한 위치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활동에 특수한 양식으로 참여하도록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5. 교회의 직무
신약성서에 여러가지 직무가 나오지만 정확하게 그 기능과 직명이 전부 규정되지는 않았다. 디모테오서, 디도서와 베드로 일서가 쓰여질 때에는 어떤 직분의 기능은 좀더 분명히 구분된다. 여기서 오늘날 성품성사의 핵심적 요소를 볼 수 있다. 주교의 안수는 한 사람을 사제로 날인한다는 핵심이 신약성서에 나온다.
오늘날 교회에는 성품성사가 세 가지 교계적 계층 혹은 품으로 나타나는데 주교품, 성품, 부제품이다. 이러한 직분은 초기교회에서도 구분되고, 교회의 초대교부들의 저서에서도 볼 수 있다. 신약성서에는 주교(지도자), 사제(원로)와 부제에 대한 언급(필립 1,1)이 자주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의 지도자를 선정하시고, 그들에게 가르치고 지도하고 성화하는 권한을 주셨다고 신약성서는 확실히 말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동반자며 교회의 기초로서 그들이 갖는 역할 이행을 위한 특정한 은혜와 의무를 받았다.
사도들이 자기들의 일을 계승하기 위하여 선정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친히 확인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보내신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조자와 후계자를 선정하였으며, 이들도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에게 안수하였다. 

(1) 주교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이다. 그리스도의 의향대로 주교들은 사도들이 처음에 하던 임무를 수행하였다. 사도직 계승은 실제로 주교들에게 이루어졌다. 주교들의 사명은 사도들과 그리스도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교는 성품되어 지방교회의 구심점이 되고 일치의 원천이 된다. 그 일치는 특히 주교들이 사제와 신도들에게 둘러싸여 성체의 제사를 드릴 때에 나타난다. 주교는 다른 주교한테서만 성품되며(교회헌장 21), 교회의 거룩한 오랜 숭엄한 전통은 주교만이 성품과 부제품을 주도록 제한한다. 주교는 견진성사의 통상 집행자이기도 하며, 지방교회의 공동체에서 일치의 원천이며 표징으로서, 예배에 있어 지도자이고, 공식적이고 전통적 전례자이며, 교구의 으뜸가는 교사이다. 

(2) 사제(신부)
사제는 주교들과 더불어 성품성사에 참여한다. 사제는 주교를 도와 교구의 일정 지역을 담당하여 복음을 전하고 신도들을 사목하며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이다. 사제는 주님의 이름으로 행동하면서 고해성사로써 죄를 사한다. 사제의 다른 기능은 설교, 교회를 위한 기도, 병자의 도유 외에 다른 성사를 집행하여 세례로써 사람들 안에 시작된 신적 생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비록 대사제직의 결정인 주교품을 지니지 못하였으므로 권한 행사에 있어서 주교에게 매여 있지만 사제로서의 영예만은 주교와 함께 지니고 있다(교회헌장 28). 통칭 신부(神父)라고 불리는 이들은 재속사제(교구에 소속된 사제)와 수도사제(수도회에 소속된 사제)로 나뉜다. 

(3) 부제
주교직이나 사제직과 마찬가지로 부제직도 성품성사의 일부이며 하느님이 제정하신 것이어서, 교회 안에 영구적 자리를 차지한다(필립 1,1).
부제라는 직명은 '봉사'라고 하는 희랍어에서 나온 것으로 사도행전 6,1-4에서 보듯이 봉사하기 위한 직책이다. 부제는 교회에 봉사하며 이미 사도시대에 부제직의 임무가 크다고 인정되었다. 부제는 전례행사를 돕는다. 즉 부제는 성체를 분배하고 세례를 주며, 복음을 선포하고 설교한다. 부제는 신앙의 증인이며 옹호자이다.
초대교회에서 부제직은 공동체 안에 중요성을 갖는 영구직이었다. 그러다가 서방교회에서는 부제직은 잠시 동안만 행사되는 품이 되었으며, 곧 사제가 되려는 사람이 채우는 직책이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영구 부제직을 복구시켰다. 유럽과 미국, 남아메리카, 아프리카를 위시한 여러 나라에서 종신 부제직을 받아들였는데, 이들 종신부제들은 사회 안에서 일반 직장을 가지고 혼인도 하면서 교회의 봉사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 제도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이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주교들의 협의에 달려 있다. 

6. 여성 사제직
교회 내에서 여성의 봉사는 초기에서부터 그리스도교적 공동체를 풍족케 하였다. 그러나 여성이 교회에서 사제나 주교로 성품된 적은 한번도 없다. 마리아도 교회 안에서 다른 어느 사람보다 더욱 큰 역할을 하였지만 아무런 사제 직무에 불리지 않았다. 초대교회는 당대의 사회적 압력에 대항하여,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 앞에 동등한 존엄성을 갖는다고 강력하게 선포하였으면서도 여자를 사제직에 부르지는 않았다.
물론 남자나 여자나 아무 신자도 성품성사에 대한 권리는 갖지 않는다. 성품성사가 영성적 성장이나 개인적 완성을 위하여 필요한 은총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품성사는 교회내에서 그리스도의 뜻에 맞추어 신앙 가족의 선익을 위하여 좋다고 판단하는 사람에게만 준다.
여성에 대해 사제직이 허락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법에 의해서라기 보다 관습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7. 사제적 소명의 표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사제직에 들어간다. 한 청년이 건강하고 상당한 지능과 사제직에 요구되는 성격을 가졌고, 또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사제적 활동을 하려는 소망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성소의 '표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소명의 여부를 확인하는 임무는 교회에 있으며, 그 선정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품할 책임도 교회에 있다. 선택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이다(요한 15,16).
성품성사는 교회 내의 한 특정 지위를 정해 주는 단순한 예식이 아니다. 그것은 성사이며, 성사를 집행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할 권한을 준 것뿐 아니라 그런 권한을 거룩하게 행사하게 하는 은총도 주는 성사이다. 성품성사는 직무에 대한 특별 은총을 준다. 

8. 사제의 독신제
교회의 초기에서부터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 일편단심으로 생명과 마음을 바치기 위하여 독신생활을 하는 사제가 있었다(1고린 7,32-35). 독신생활은 사제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더욱 비슷하게 한다. 성 바울로는 독신생활이 그리스도에게 봉사하는 데에 많은 자유를 주고, 그분께만 전적으로 투신할 수 있게 한다고 지적하였다(1고린 7,32-35).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설교하는 사제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크나큰 개인적 희생을 하며 일생을 살도록 교회는 원하고 있다. 사제의 독신생활은 종말론적 표지, 영생을 가리키는 표지라고 볼 수 있다.
아무도 사제생활을 강요받지 않기 때문에 사제의 독신생활 규정은 결코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독신생활을 자유로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사제직에 응답한다. 독신생활 규정을 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완화할 권한이 교회에 있다. 그러나 교회의 경험과 신약성서의 메시지는 사제들이 생활화하는 이 특은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매우 좋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제는 기도의 사람이어야 한다. 사제가 누구이고, 무엇을 위하여 불림을 받았는지에 관한 사색과 묵상이 사제의 일상생활의 일부이어야 한다. 사제는 깊은 영성적 확신과 기도와 희생의 정신이 없이 자기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수 없다. 

9. 사제의 권위: 봉사를 위한 권위
사제의 권위는 언제나 인간의 영적 선익과 일치를 지향하는 교회의 목적과 조화를 유지하면서 행사하여야 한다. 첫 번째 권위의 행사는 사제가 하느님의 말씀을 시대에 맞는 방법으로 신자들에게 권위있게 해석하기를 요구한다. 두 번째 권위의 행사는 사제는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 그리스도께서 부여한 권위를 가지고 그리스도교의 공동체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사명과 관련된다(요한 17,11). 결국 사제가 갖는 권위란,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한 권위이며 사제 자신을 위한 권위가 아닌 것이다. 

10. 사제와 사회정의 문제
사제 본연의 사명은 정치, 경제나 사회적 질서의 사명이 아니라 종교적 질서의 사명이다(사목헌장 42). 그러나 사제는 자기 직무를 이행하면서 특히 인간의 불의와 억압의 문제가 아주 심한 지방에서, 좀더 의로운 사회질서 건설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일 사제가 사회, 정치적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 한다거나 거기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면, 이는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선포하고 실현하여야 하는 예언자로서의 직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제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 할 것이다.
사제는 이 세상의 불의에 맞서 싸워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의 뜻대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 정의가 필요하며, 이러한 정의를 해치는 불의를 고발하고 제거할 임무를 사제는 갖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제가 직접 정치, 경제 문제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력할 필요가 있으며,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개선책도 제시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제는 자신의 신분에서 이탈하지 않고도 사회를 개선하는데 이바지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회정의에 투신하는 경우에도 사제는 항상 교회적 일치를 유지하며, 복음과 부합하지 않는 말이나 폭력을 배척해야 한다.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며, 새로운 폭력을 낳기 때문이다. 



33장  고해성사


<요점정리>

▨ 고해성사란 무엇인가?고해성사란 하느님과 이웃을 거슬러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교회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제에게 그 죄를 드러내는 것이다. 
▨ 고해성사의 효과는 무엇인가?고해성사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벌을 면제받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하고 또한 내 이웃과도 화해한다.


1. 고해성사의 제정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에게 입으로 숨을 내쉬면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이렇게 해서 고해성사가 제정되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도와 그들의 후계자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심으로써, 교회 안에 고해성사를 제정하셨다. 영세 이후 죄에 떨어지는 신자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은총을 회복할 수 있다.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는 죄를 사하는 이 권한을 행사하였다. 교회가 이 권한을 이행하는 예식인 고해성사에는 여러 가지 형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계속적으로 죄를 사하신다는 믿음은 언제나 가톨릭 교회의 신앙이었다. 

2. 고해성사의 형식
트렌트 공의회는 성 베드로에게 주어진 사죄권을 지적하면서, 재판 형식의 고해성사를 설명하고 정당화한다. 더 나아가 사제는 '판사'처럼 행동하면서 죄를 사한다고 트렌트 공의회와 현대 교회는 가르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죄권을 주시고, 사도들에게도 지상에서 푸는 권한을 주셨을 때에(마태 18,18), 인간의 사법심리 절차를 하느님의 정의의 표징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사도들로 하여금 그 이후에도 사죄권을 갖게 하셨다(마태 19,28).
범인인 죄인은 자신을 고소하고, 주님의 대리자 앞에서 유죄를 인정하고, 통회하며 주님께 다가간다. 고해성사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주님의 이름으로 고해을 듣는 사제는 고해자의 마음 개방, 통회, 회개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에 따라 죄를 용서해준다. 사제가 고해를 듣는 것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이다. 그래서 사제에게 한 말은 절대 비밀의 의무로 보호받는다. 그 표지를 통하여 행동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재판관이시다. "우리는 다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이다"(로마 14,10). 

3. 고해성사를 위한 세 가지 요구 조건
죄는 하느님과 맺은 우정,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형제, 자매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맺고 있는 친교를 깨뜨리는 것을 말한다. 고해성사는 바로 이러한 죄로 인한 파괴, 분열을 복구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그리고 내 이웃과 다시 화해시키는 성사이다. 그러기에 고해성사를 '화해의 성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죄는 자동적으로 용서되지 않는다.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 안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죄를 완전히 용서받자면 성사의 세 가지 중요한 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참회, 고백, 보속이다. 
(1) 참회(또는 통회·痛悔)
제일 중요한 것은 참회이다. 하느님을 침해하였음에 대한 진정한 아픔이 따라야 한다. 참회는 사랑을 파괴하고 위협하는 모든 것을 배척하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고, 죄를 반복하지 않기로 결심하지 않고, 또한 하느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내적 통회이어야 한다. 통회는 신앙의 동기에서 나온 것이어야 하며, 인간 행동의 어떤 나쁜 결과에 대한 후회에 기초한 단순한 인간적 후회이어서는 안된다. 하느님 외에 아무것도 더 중요시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의미한다. 하느님과의 우정을 끊는 모든 대죄에 대하여 슬퍼해야 한다. 
(2) 고백
하느님의 법에 의하면 조심스러운 양심성찰을 해서 기억할 수 있는 모든 대죄뿐 아니라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도 사제에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영세 이전에 범한 죄를 고백할 필요는 없다. 또한 한 번 고백하여 사죄를 받은 대죄를 다시 고백할 필요는 없다. 
(3) 보속
교회는 죄에 대한 '현세적 벌'이 있다고 믿는다. 하느님은 고해자가 자기 죄에 대하여 보상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고해자는 사제가 요청하는 '보속'을 함으로써 자기 죄에 대한 약간의 보상을 하여서 고해행위를 완수해야 한다. 보속이란 사제가 고해자에게 주는 실천행위를 채우는 것으로 자신의 죄로 인한 정신적인 상처나 물질적인 손해를 진정으로 기워 갚고자 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보속행위는 실제로 죄에 대한 치료약이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약으로써 생활개선을 위한 도움이 된다. 

4. 완전한 참회(상등통회·上等痛悔)
하느님께 대한 참된 사랑이 참회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모든 것 위에 사랑하기로 한 하느님을 아프게 하였기 때문에 슬퍼하는 참회라야 '완전한 참회'라고 할 수 있다. 참회가 신앙의 다른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면, 즉 공의로우신 하느님의 처벌이 무서워서만 통회한다면 그 참회는 '불완전한' 것(하등통회·下等痛悔)이다.
중죄에 떨어졌던 사람이라도 완전한 참회를 하면 즉시 하느님과의 친교를 다시 맺게 된다. 그러나 특수한 환경에서가 아니면 대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신앙의 가족과의 관계를 파괴했던 사람은 성체를 영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을 중대한 의무를 가진다. 
5. 고해성사의 대상이 되는 죄
모든 죄가 하느님과 이웃을 거스르므로 큰 죄(대죄), 작은 죄(소죄)로 나누어 어떤 죄가 고해성사의 대상이 된다고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다. 일반적으로 십계명을 거스르는 죄는 전부 고해성사의 대상이 된다. 주관적으로는,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무겁게 느껴지는 죄 또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
하지만 사소한 죄에 대해서까지 병적으로 고해성사를 볼 필요는 없다. 고해성사의 목적은 하느님과의 화해이지, 하느님의 벌을 피하는데 있지 않으며, 하느님은 우리에게 벌을 주려고 기다리는 판사가 아니시라 우리가 돌아오기를 고대하시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잃었던 아들'(루가 15,11-32)에서 처럼 착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또 미사 때 우리는 참회예절을 하는데, 이로써 우리의 사소한 죄는 전부 사해진다. 

6. 대사(大赦)
약점을 가진 우리를 돕기 위해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대사를 제공하기도 한다. 대사는 이미 용서받은 죄에 해당하는 현세적 벌의 전부나(전대사·全大赦) 부분의(한대사·限大赦) 면제를 말한다. 대사의 원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교리에 기초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권한의 힘으로 죄의 용서를 이미 받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 일부를 나누어주며, 죄에 해당하는 현세적 벌의 양을 제거하거나 경감할 수 있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대사를 얻기 위해서는 기도를 하든지 아니면 교회가 대사에 부과하는 선행을 해야 한다. 
7. 고해성사의 효과
고해에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죄인은 치료의 은총을 받아 회복하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며, 잃었던 아들과 같이 성부의 환영을 받는다(루가 15,20-24). 동시에 죄인은 공동체 안에 돌아와 공동체의 성찬 식탁(영성체)에 다시 참석한다. 고해성사는 실제로 세례의 거룩한 상태를 회복하거나 갱신한다. 세례의 거룩한 상태를 잃으면 고해성사로써 회복할 수 있다. 대죄를 범한 신자에게는 고해성사를 받고 죄의 용서를 청할 의무가 있다. 죄의 용서는 가능한 한 속히 청해야 한다. 교회법은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씩 고해성사를 받으라고 요구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대죄를 지은 이들은 그때마다 가장 빠른 시기에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 고해성사를 조심스럽게 자주 받는 것은 소죄의 치료에도 매우 유익하다.
잦은 고해성사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 안에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열심한 이에게는 고해가 깊은 회개를 하는 방법이고, 성령 안에 키워지는 방법이 된다. 이런 정신으로 교회는 규칙적이고 잦은 고해를 권장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여 성사를 병적으로 자주 보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8. 어린이 고해성사
유아가 세례를 받을 때에는 부모와 대부모가 유아를 대신한다. 그러나 지능이 발달하면, 어린이들은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 준비하면서 자신들의 유아세례를 실현하고 재생시킬 수 있다. 어린이 고해성사는 너무 오래 지연되지 말아야 한다. 어린이의 논리적 사고가 성숙함에 따라 도덕적 양심에 비추어서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는 능력도 수련되어야 한다.
어린이는 첫영성체를 하기 전에 첫 고해를 해야 한다. 고해와 영성체에 적절한 연령은 어린이가 추리하기 시작하는 때이다. 즉 만 9세쯤이다. 그 시기부터 고해와 영성체에 관한 법규를 지킬 의무가 시작된다. 

9. 고해성사의 공동체성
초대교회에서 어떤 중죄를 범한 죄인은 파문되고, 공개적 보속행위를 해야 하였으며, 성목요일에 성찬식에 참여함으로써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였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의 지체이므로 한 지체의 병은 몸 전체에 고통을 일으킨다. 적어도 개인의 실패는 몸 전체의 성장을 방해하고 활동력을 제한한다(1고린 12,26).
자신만을 직접 해치는 죄악도 공동체의 조화를 깨뜨릴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도둑질을 할 때 그는 타인을 침해하고, 그 사람과 가족에게 손해를 끼친다. 또한 그는 공동체 전체의 개방성과 상호 신뢰에 금이 가게 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생명의 맥박을 흐리게 할 수 있다.
널리 퍼진 사회 부조리도 마찬가지이다. 소수의 사람이 어둡고 엄청난 부조리와 관련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양심성찰을 할 때에 자기의 사회적 책임과 죄악의 사회적 결과를 성찰해야 한다. 

10. 고해성사 예식의 종류
고해성사는 공동예식과 개인적 예식 두 가지 방법으로 집행될 수 있다. 공동예식도 성사의 중요한 개인 요소는 보존되어야 한다. 각 고해자는 자기의 죄를 개별적으로 고해하고 개별 사죄를 받는다. 그리고 개인적 예식도 교회의 모든 전례행위가 그러하듯 공식적 요소를 갖는다. 고해성사는 보통으로 공식적으로 인가한 장소에서 집행되고, 중죄를 범한 사람은 사죄를 받을 때까지 성찬 식탁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영성체 할 수 없다). 
공동고해는 고해의 교회적 성격을 더 명백히 드러낸다. 공동고해는 죄의 사회적 측면을 인정하며, 죄인이 하느님께 돌아오면 공동체와도 화해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공동고해의 독서, 성가와 기도는 참석자들을 통회시키면서 하느님의 가족으로 묶어 주고, 각 고해자가 개인적 회개와 새로운 결심을 깊이 하도록 돕는다. 개인고해에도 일정한 이점이 있다. 개인고해는 융통성이 많으며, 성사 집행이나 영성적, 사목적 지도를 병행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특수한 이유 때문에 개별적으로 죄를 고해할 수 없을 때에는 공동 사죄경으로써 성사적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지방주교가 규정한 중대한 요구가 있을 때에만 공동사죄를 줄 수 있다. 공동사죄를 받은 이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공동사죄를 재차 받기 전에 개인고해를 해야 한다. 개별적 고해와 개별사죄만이 신자들이 하느님과 교회와 화해하는 정상적인 길이다. 

11. 고해성사 예식
     (1) 사제 앞에서 고해성사를 보기 전
          ①조용히 자신이 지은 죄를 알아 냄(양심성찰)
          ②지은 죄를 뉘우침(참회)
          ③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함
          ④고해소에 들어감 
     (2) 고해성사를 보는 방법(○는 고해자, 는 사제)
          ○(사제 앞에서 십자 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당신이 범한 죄를 사실대로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으십시오. ○아멘
          ○(고해성사 본 지가 언제인지를 말한다)
             고해성사 본 지 (몇달, 몇주일) 됩니다.
          (알아낸 죄를 일일이 구체적으로 고백한다)
          ○(죄의 고백이 끝난 후 사제는 훈계와 보속을 준다)
          ○(보속을 받은 후 통회의 기도를 한다)
내 하느님, 나의 범죄로 만유 위에 사랑받으셔야 할 당신의 마음을 상해드렸사오니 악을 저지르고 선을 소홀히 한 나의 모든 잘못에 대하여 진심으로 통회하나이다. 또한 당신의 은총으로 속죄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범죄의 기회를 피하기로 굳게 결심하오니,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공로를 보시고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아멘.
          † (사제는 고해자 머리 위에 손을 펴들고 사죄경을 외운다)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 주셨으니, 교회의 직무수행으로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
          ○ 아멘.
          † 야훼님 좋으시니 찬미합시다.
          ○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도다.
          † 주께서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 감사합니다. 

 제 12편
34장  혼인성사

<요점정리> 
▨ 그리스도는 혼인성사를 통해서 무엇을 하시는가?
그리스도는 혼인성사로 부부를 당신과 교회와의 사랑에 일치케 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자녀 출산과 교육을 통해서 서로 돕고 성화케 한다.

1. 성서에 나타나는 혼인
하느님은 혼인을 예정하시고, 창조의 절정 순간에 그것을 설정하셨다. 창조에 대한 두 가지 설화에는 혼인제도에 관해 두 가지 설명이 있다. 첫째, 창조설화에서는 출산이 강조되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창세 1,28). 둘째, 설화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우정관계가 먼저 나온다. "이리하여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게 되었다"(창세 2,24). 충실한 일부일처제가 구약성서에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잠언서는 아내를 책임과 위엄을 가진 동업자로 묘사한다(잠언 31,10-31). 
신약에서 혼인이 성사라고 표현한 것은 성 바울로의 에페소서이다. "남편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32).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와의 일치는 매우 친밀하여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보다 더 적합한 비교는 없다. 또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표징도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적절히 표현된다.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와의 일치는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고, 남편과 아내의 결합도 교회와 그리스도의 일치의 신비와 연관되기 때문에 서로 거룩하게 한다. 

2. 혼인과 독신
성 바울로는 혼인의 신성함을 강력히 주장하면서도 동정이나 독신생활 또한 권고한다(1고린 7,32-34). 교회는 혼인을 존중하며, 동시에 하느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영생에 대한 신앙을 뚜렷이 증거하기 위하여 혼인의 축복을 포기하는 생활형태(독신생활)도 또한 존중한다. 이런 생활을 하도록 불림받은 사람에게는 동정생활이 자신을 더욱 철저하게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이 세상은 사라져가고 있는데"(1고린 7,31), 동정생활은 영생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는 강력한 방법이다.
혼인성사로 결합한 사람들은 교회와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보이는 표지이다. 독신자들은 혼인을 포기하지만 사랑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독신자들은 오히려 혼인이 표지하는 그리스도의 저 위대한 사랑을 특별한 방법으로 증거한다. 그들은 부부애가 거룩한 것이지만 잠정적 사랑이며,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사랑과, 서로의 완전한 사랑에 이르는 수단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결혼소명과 독신의 소명은 서로 대립하기는커녕 사랑의 성덕을 추구할 그리스도인의 기본 소명 안에서 서로 돕는다. 

3. 혼인의 세 가지 선익(善益)
혼인의 세 가지 선익은 자손, 정절, 성사(聖事)이다. 하느님이 혼인을 세우시고 성화하신 것도 그 선익을 위해서이다.

(1) 정절(부부애)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혼인을 '사랑의 공동체'(사목헌장 47)라고 부른다. 정절은 최소한의 소극적 의미에서 결혼 상대자가 아닌 어느 누구와도 성행위를 하는 것을 금한다. 그래서 정절은 부부애를 보호하는 보루이다. 부부애로 깊이 맺어진 공동체는 조물주 친히 제정하셨고, 조물주 친히 그 법칙을 주셨으며, 결혼 당사자도 철회치 못할 인격적 동의로 맺은 계약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교적 부부애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순수한 사랑의 결실과 애덕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 이 사랑은 인간의 전행복을 고려하며, 품위있게 사랑을 표현하게 한다. 주께서는 이 사랑을 당신의 은총과 특별한 은혜로써 정화시키고 완성하시고 높혀 주셨다(사목헌장 49).
상호간에 주고 받는 사랑은 당사자간의 기본적 평등성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남편과 아내의 상호 의무는 동일하다는 매우 혁명적인 사상을 가르치시면서 부부평등의 기반을 쌓으셨다.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또 나아가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 10,11-12).
진실한 사랑의 유대는 이기심과는 달리, 상대방을 위해서 상대방의 이득을 추구하려는 자유스럽고 굳은 투신에 기초를 두기 때문에 지속성을 갖는다. 

(2) 자손(출산)
자녀 출산이 혼인의 기본되는 선익이라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확인하였다. 혼인의 목적은 '사랑의 나눔'과 '생명의 전달' 그리고 '상부상조'에 있다. 즉 한 쌍의 남녀가 사랑을 성취함으로써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며 서로의 역할 안에서 서로를 도와 주는데 있는 것이다. "혼인과 부부애는 그 성격상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한다. 자녀들은 혼인의 가장 뛰어난 선물이다"(사목헌장 50).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셨다. 창조에는 당신의 끝없는 선(善)을 연장하고, 보급하고, 나누어 주기 위한 것 외에 다른 동기가 없다. 부부가 자식을 낳으며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랑의 창조적 능력에 참여시키신 것이다. 교회는 인위적인 피임 방법을 거부한다. 성을 쾌락의 도구로 만들 위험성과, 하느님의 선물인 자녀 출산을 인위적으로 부정할 가능성 때문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인구문제를 모른체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절한 수의 자녀를 갖는 것이 가정의 품위를 지키는 데 유리할 수도 있음을 교회는 알고 있다. 따라서 현재 교회는 부부가 서로 협력해서 할 수 있는 자연피임법을 권장한다. 

(3) 성사
①혼인성사의 집행자
혼인성사의 집행자는 혼인 당사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이혼을 금지하시므로 교회는 혼인 과정을 조심해서 감독하고자 한다. 보통으로 가톨릭 신자들은 사제와 두 증인 앞에서만 유효하게 혼인할 수 있다. 혼인식을 주례하는 사제는 "신랑 신부의 동의를 묻고 그 답을 받아야 한다"(전례헌장 77). 그가 주교이거나 본당신부이거나 대리자이더라도 그 부부가 혼인할 자유가 있고, 혼인성사의 중요성과 존엄성을 알기에 충분한 교육을 받고, 혼인의 목적과 의미를 알면서 진정한 혼인계약을 맺으려는 것인지 보살필 의무를 갖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혼인성사를 받기 전 일정한 교육(예: 가나혼인강좌)을 받도록 하고 있다. 

②혼인의 불가해소성(不可解消性)
혼인은 불가해소적 사랑의 계약이다. 혼인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영원한 사랑을 상기시키는 거룩한 표징이다. 그 계약처럼 혼례를 마친 혼인성사의 효력은 절대로 풀리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창세기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듯 하느님께서는 '이혼'을 인정하시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 역시 분명하게 '이혼'을 엄금(마태 19,4-6; 루가 16,18)하시면서 그것이 창조주의 본래의 뜻이라고 명시하셨다(마태 24,35). 사도 바울로 역시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1고린 7,10-11. 39; 로마 7,2-3).
어떤 경우에 하느님은 사회관습법에 의한 혼인을 해소하는 것을, 다시 말하면 영세하지 않은 두 사람이 맺은 혼인의 해소를 허락하신다. 비신자 부부 중에 하나가 신자가 된 경우에, 비신자가 신자와 평화롭게 살기를 거부하면 교회는 그 신자의 재혼을 허락한다. 교회는 성 바울로의 말씀(1고린 7,12-16)을 그렇게 이해하여 왔다. 이 권리를 '바울로 특전'이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자간의 혼인성사이었고, 참된 혼인합의와 혼인성사를 받았으면, 한 배우자의 죽음으로가 아니고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교회는 굳게 선언하고 가르친다. 

4. 혼인의 특수문제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하고 또 신자들도 교회 밖에서 재혼하는 경우가 많다 하더라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이혼과 재혼을 허락할 수는 없다. 혼인 계약의 지속적 힘을 담대하게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남편, 아내, 자녀의 선익을 위하는 길이다. 그러나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 교회는 부부가 공동생활을 피하여 별거하는 것을 허락한다. 어떤 극단적 상황에서는 부부가 계속 동거하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일 수 있다.

(1) 혼인의 무효선언
겉으로는 혼인계약에 하자가 없어 보이나 실제로 결함이 있을 수 있다. 즉 결혼 당사자 중에 한편이나 양편이 자유로운 동의를 하지 않았거나 할 수 없었다면, 진실한 혼인계약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초부터 진정한 혼인이 아니었다면, 그 사실에 대한 공식인정을 교회 법원에서 받을 수 있다. 그 인정을 취소 혹은 더 정확하게는 무효선언이라고 한다. 한 사람의 혼인이 유효하지 않았다고 결정되면 다른 사람과의 재혼이 가능해진다. 

(2) 혼인조당(婚姻阻當)
혼인신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교회는 혼인조당을 선언할 권리와 조당을 설정할 권리를 갖는다. 조당이란 신법이나, 교회법 때문에 혼인을 무효화하거나 불법화하는 사정을 말한다. 혼인을 무효화하는 조당, 즉 혼인을 처음부터 참된 혼인이 안되게 하는 조당을 '절대조당'이라 한다. 이 중에는 적당한 연령 미달, 성교 불능증, 이미 혼인성사를 받은 자, 성품 수령, 한쪽 당사자의 장엄 정결서원, 너무 가까운 촌수, 어떤 범죄 등을 포함한다. 가톨릭 신자와 비영세자간의 관면 없는 혼인도 무효이다.
혼인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해서 설정한 다른 조당을 '방해조당'이라고 부른다. 가톨릭 교회 신자가 세례받은 개신교 신자와 혼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조당이다. 이런 조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행된 혼인은 유효하기는 하지만,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서 교회는 이러한 혼인을 금지한다. 교회 안에서 혼인하려면 혼인 집행 전에 교회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한다. 

(3) 문제의 해결
알면서 무효혼인을 한 신자는, 하느님 앞에서 실제적으로 현재의 배우자와 혼인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되도록 빨리 은총 지위에 돌아올 의무가 있고, 돌아올 때까지 영성체를 할 수 없다. 어떤 복잡한 경우에라도 문제 해결을 위해 교회는 노력한다. 본당 신부와 교구 혼인재판소는 무효혼인을 한 사람들을 돕도록 힘쓸 것이다. 

5.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의 사랑: 부부애의 모형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부부애의 모형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희생적 사랑이었고, 필요할 때에는 고통도 감수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부부가 죽을 때까지 서로 성실히 사랑하자면, 서로 용서하고 십자가를 잘 지는 것을 배워야 한다.
거기에 따르는 온갖 기쁨과 고통을 맛보며 가정을 돌보자면 자신을 내놓을 필요가 생길 것이다.
혼인 집전은 "보통으로 미사 중에 있어야 한다"(혼인예식서 6). 이것 역시 혼인성사가 파스카 신비에서 나옴을 의미한다. 혼인미사 중에 말씀 전례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차지하는 혼인의 중요성과 부부와 자녀들의 성화에 힘써야 할 혼인의 직책과 임무"를 설명한다. 

35장  병자성사

<요점정리> 
▨ 우리는 병자성사를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병자성사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파스카 신비)에 특별한 모양으로 참여하며, 그분의 위로와 용기를 받으며, 필요한 경우 육신의 건강과 영혼의 건강을 얻게 된다.

1. 병자성사의 기원
우리 주님은 병자에 대하여 동정심을 보이셨다. 그리스도는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마태 11,5)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요한에게 밝혔다. 환자의 치료는 그리스도의 활동 가운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마지막 심판에 관한 비유에서 벌받을 사람들에게 "내가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주지 않았다"(마태 25,36)고 예수님은 말씀하셨고, 반면에 상받을 사람들에게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다"(마태 25,43)고 말씀하셨다.
사도들이 복음선포를 돕기 위하여 활동할 때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 부활 후에도 비슷한 사명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마르코 복음의 앞부분에서는 "그들은 마귀들을 많이 쫓아내며 수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3)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병자성사의 도유에 관한 첫 암시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구마적 치유로 이미 존재하던 관습을 인준하시면서, 그 관습에 새로운 의미를 부과하셨다(루가 4,18-19).
견진성사에서와 같이 우선 초대교회에서 행하여진 병자의 도유에 관한 기록을 야고보서에서 볼 수 있다. "여러분 중에 앓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2. 병자성사의 대상자
중세 때는 죽을 것이 거의 확실한 사람에게만 이 성사를 베풀었다. 그래서 이 성사의 명칭이 '종부성사' 즉, '죽음의 성사'로 불리웠고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이 성사받기를 두려워하는데, 이는 잘못된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병자성사는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만 베푸는 성사가 아니라 병과 노쇠로 위험상태에 있는 이들이 이 성사를 받을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즉 신자가 병이나 노쇠로 죽을 위험이 엿보이면 벌써 이 성사를 받기에 합당한 시기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병자가 죽음의 직전에 있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병자가 이 성사를 받은 후 건강을 회복하였다가 다시 병들었을 경우라든가 또는 같은 병세가 계속되다가 중태에 빠지게 되는 경우에는 반복해서 받을 수 있다. 위험한 병 때문에 외과수술을 받아야 할 때마다 병자는 수술 전에 이 성사를 받을 수 있다. 노환으로 말미암아 기력이 많이 쇠진해지는 노인들에게는 병세의 위험성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아도 이 성사를 줄 수 있다. 어린이들에게도 그들이 이 성사로써 힘을 얻을 수 있을 만큼의 나이가 되었으면 역시 병자성사를 줄 수 있다(약 7∼8세 이상).
사제가 병자한테로 불려갔을 때 병자가 이미 죽었을 경우, 사제는 그를 위해서 하느님께 그의 모든 죄를 사해주고, 자비로이 천국으로 받아 주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지만, 병자성사는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만일 병자의 죽음이 확실하지 않을 때는 조건부로 이 성사를 줄 수 있다. 
3. 예식
병자성사를 베푸는 이는 주교, 본당신부, 병원 원목과 이들의 위임을 받은 사제들이다. 이 예식은 인사, 시작예절, 참회식으로 시작한다. 말씀 전례가 그 다음에 온다. 친구와 친척이 기도와 노래에서와 같이 독서에도 참가하여 공동체적 분위기를 만들면 더 좋다. 먼저 참석한 사제 모두가 안수한다. 그리고 성사 집행자가 병자의 이마와 양손에 혹은 급한 경우에는 이마나 몸의 아무 부분에 기름바른다. 성유를 바르는 행위가 안수이기도 하다. 특히 이 기름바르는 예식과 그것에 따르는 기도가 성사적 표지이다. 병자의 도유 예식은 환자를 위한 특별기도로 끝을 맺고 주님의 기도, 혹은 영성체와 강복이 뒤따른다. 기름바르는 예식을 미사 중에도 할 수 있다. 

4. 효과
"이 성사는 성령의 은혜로서, 성령의 도유는 아직도 속죄해야 할 어떤 죄과가 있다면 그 죄과와 죄의 결과를 씻어 주어, 병자의 영혼을 거뜬하게 해 주며, 견고케 해 주고, 그에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를 일으켜 줌으로써 병자로 하여금 그 도움을 받아 병고와 고생스러움을 더 쉽게 참으며 마귀의 유혹에 더 잘 대항하게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의 구원에 도움이 될 경우에는 육신의 건강까지도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병자성사 예식서 119).
대죄가 있는 줄을 알면서도 병자성사를 받으면 크게 잘못하는 것이다. 대죄가 있다면 먼저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대죄 중에 있는 병자가 의식을 잃었으나, 신앙과 희망의 행위와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두려움으로 준비하여서 성사의 은총을 받기에 적절한 상태에 있을 때 병자성사는 대죄라도 사한다. 병자성사는 그것을 받는 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신비에로 인도하는 내적 고해 즉 참회를 하게 한다. 고통이 치유의 방법이 되려면, 우리의 고통을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관시켜야 한다. 성 야고보가 지적하였듯이 그것이 병자성사의 독특한 은총이다. 

5. 고통과 파스카 신비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병으로 인한 고통이 어떻게 파스카 신비와 연결되는지 보여준다. 교회 전체는 "병자들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수난과 돌아가심에 자유로이 결합시켜, 하느님 백성의 선익에 기여한다"(사목헌장 11)고 한다.
병자의 도유가 육체의 병을 고치든 고치지 못하든 정신을 위한 치료가 되어, 곤경 중에서도 매사가 희망적이고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는 기쁨을 맛보게 한다. 

6. 노자성체(路資聖體)
인간은 탄생하여 이 세상에서 살다가 노쇠하여 죽어간다. 죽어가는 환자가 하는 영성체를 노자성체라고 한다. '여행을 위한 음식'이고 마지막 여행을 위해서 받는 영성적 음식이다. 그것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54)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이다. 

36장  그리스도인의 죽음

<요점정리> 
▨ 그리스도 신자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혼과 육신이 서로 갈리어 육신은 썩을지라도 영혼은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 나아감이며, 따라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1. 죽음의 의미
그리스도교 신자에게는 죽음의 의미가 여러 가지이다. 인간의 죽음은 자연적이다. 우리 생명은 시간으로 측정하고 시간 안에 우리는 변한다. 늙어서 죽는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죽음은 죄의 벌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영혼은 육체에게 생명을 주도록 창조된 인간의 생명 원리이다. 육체가 죽은 후에도 이 생명의 원리는 계속 생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육체가 분해된 후에라도 계속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직접 뵈옵고, 하느님의 생활에 참여한다. 하지만 '육체를 떠나 있는 것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는 육신의 부활을 기다린다.
구약성서에서는 죽음과 죄악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확실하였지만(창세 2,16-17), 초기에는 인간이 지상생활이 끝난 후에 개인 생명이 계속된다는 인식이 분명하지 않았고 오히려 죽음으로써 종교활동이 끝난다고 생각하였다.
묵시문학(다니 12,1-14)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 싹 텄고, 지혜문학은 인간의 불멸에 관한 좀더 밝은 전망을 제시하였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에 있어서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을 것이다 … 사람들 눈에 의인들이 벌을 받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불멸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 3,1-4).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죽음에 관한 사색보다 모든 백성의 생활을 완성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초기에는 개인의 죽음에 관한 집념이 크지 않았다. 점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죽은 자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죽음의 신비에 관하여 진지하게 숙고하게 하였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도적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나(루가 23,43), "육체를 떠나서 주님과 함께 평안히 살기를 원한다"(2고린 5,8)는 바울로의 말씀은 죽음을 숙고하는 지침이다. 그래서 마지막 사건들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서서히 이루어졌다. 죽음 직후와 마지막 부활 전에 있을 개인의 상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도 후대에 와서야 정식으로 규정하였다. 

2. 사심판(私審判

<요점정리> 
▨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사람이 죽으면 하느님 앞에서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에 대해 심판을 받는다.
▨ 심판은 몇가지 있는가?사심판과 공심판(公審判), 두 가지가 있다. 
▨ 사심판이란 무엇인가?사람이 죽을 때 육신을 떠난 영혼이 하느님 앞에서 각자 받는 심판을 말한다.

사람은 죽은 후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다. 교회는 은총 중에 죽어, 더 이상 정화가 필요없는 사람은 죽자마자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은총상태에서 죽었으나 정화가 필요한 이는 그 정화가 끝난 후에 하늘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 대죄 중에 죽은 사람은 죽자마자 끝없는 벌을 받기 시작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어"(집회 15,14) 자유롭고 책임을 지게 만드셨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보고 인간의 모든 행동을 아신다(집회 15,18-19). 그리고 이 생명이 끝나면 각 사람은 주님께 보고를 드려야 한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는 날에는 우리가 육체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2고린 5,10).
죽은 후에 개개인이 받는 심판인 사심판은 분명히 규정된 가르침은 아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개개인이 죽자마자 상이나 벌이 시작된다고 교리 안에 함축되어 있다(필립 1,21-23). 사람이 쌓아 올린 공적 전체는 죽는 순간에 드러난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에야 개인과 하느님, 개인과 창조 전체의 관계가 나타난다. 

3. 연옥(煉獄

<요점정리>
▨ 연옥이란 어떤 곳인가?
연옥이란 세상에서 정화되지 못한 영혼들이 하느님을 뵙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전까지 단련받는 곳이다.
어떤 이는 은총 중에 하느님과 우정을 맺은 상태에서 죽었으나 소죄나 불완전을 가지고 있거나, 죄에 대한 보속을 다하지 않은 수가 있다. 이러한 영혼들은 하느님을 뵈러 가는 데에 방해되는 마지막 장애를 연옥에서 씻는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지상에 남아 있는 신자들은 미사, 기도, 자선과 교회의 관습대로 신자들이 다른 신자에게 하는 여러 선업으로써 연옥에 있는 이들에게 위로와 그 기간이 단축되도록 중재할 수 있다.
'연옥'이란 말이 성서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옥에 관한 믿음은 오래 되고,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성서의 분명한 가르침에 뿌리박고 있다. 연옥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을 뵙기 위해서 성덕이 필요하고, 용서받은 죄에 대한 현세적 벌이 있다는 교리에 근거한다(2마카 12,45). 교부들의 저서에는 연옥의 존재뿐 아니라 기도 특히 미사로써 죽은 신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한다(교회헌장 50).
연옥 고통에 대하여 교회가 분명히 규정한 것은 없다. 연옥의 가장 큰 고통은 '하느님과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연옥에 있는 영혼은 그제야 하느님의 무한하신 선함을 전보다 더 깊이 깨닫고, 잠시라도 자기가 만든 장애 때문에 하느님을 직접 뵙는 복을 누리지 못해서 고통을 당한다. 영혼은 고통을 당하지만 평화를 느낀다. 이제 구원은 아주 확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4. 임보(limbus)
13세기부터 특수한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죽은 후에 가는 장소나 상태를 지칭하기 위해서 '임보'란 말을 사용했다. 세례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에게는 자기 죄가 없다. 그러나 세례성사로써 구원 은총을 받지 못하였고, 다른 방법으로 주어지는 은총에 자유로운 응답을 한 것도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을 따르는 대부분의 신학자는, 그 유아들이 은총 없이 죽어서 하느님을 뵐 수 없지만, 하느님은 그들에게 자연적 행복을 주실 것이라고 가르쳤다. 임보의 존재나 성격에 대하여 교회가 공식선언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5. 지옥
교회는 슬프고 한탄스러운 영원한 죽음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모든 세기를 통하여 신자들에게 경고하였다. 지옥과 악의 신비 사이와 지옥과 인간의 자유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관련이 있다.
지옥에 대한 참된 이해가 구세사의 초기단계에는 없었다. '셰올'(Sheol·저승 또는 지옥)은 선인과 악인이 죽은 후에 어둡고 불만스러운 실존 형태를 함께 견디면서 사는 장소라고 생각하였다. 셰올은 악인이 벌받는 장소일 것이란 계시가 서서히 주어졌다. 그 계시로 말미암아 인간은 행동에 대한 책임을 더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주 지옥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지옥에 대해 당신이 상상한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삶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마태 25,46). 이것이 처음부터 교회의 가르침에 포함되었다.
지옥벌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하느님 안에서만 인간은 자신이 갈망하는 생명을 가질 수 있는데, 지옥은 하느님과의 영원한 이별을 의미한다. 저주받은 자들은 성서가 언급하는 "영원한 불"(마태 25,41)로 인한 감관(感官)의 고통을 당한다. 교회는 그 불의 본성이 무엇인지 규정하지 않았으나, 저주받은 자의 벌은 손실일 뿐 아니라 끝없는 후회와 보상받지 못하는 자기 증오의 고통이 있다.
지옥에 가도록 하느님이 예정한 사람은 없다. 사람이 고의로 또한 알면서 중대한 죄를 짓고 끝까지 그것을 고집하기 때문에 간다.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삶을 누리도록 창조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돌아서서 하느님의 생명을 배반했다. 하느님이 가혹하시기에 지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의가 지옥을 만들어 낸 것이다. 

6. 그리스도인의 죽음
그리스도 신자는 죽음을 예수님께 다가감이요 생명에로 돌아감이라고 본다. 은총 중에 죽는 이는 예수님의 현존 안에 있고, 삼위일체에 대한 지복직관을 갖는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신앙과 사랑 안에 죽는 이는 생명에로 들어간다(교회헌장 48). 그들은 그리스도, 그의 모친, 성인들과 우정을 맺고 영광을 누리면서 하느님을 본 모상대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교회헌장 49). 

7. 성인의 통공(通功)
교회는 지상에서 신앙 안에 사는 이들의 가족일 뿐 아니라 성인들의 집단이다. 여기서 성인이란 교회의 공식 선언에 의해 공경을 받는 신앙의 모범이 되시는 분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화 속에 고이 잠든 이들을 말하며, 우리는 지상에 살면서도 그분들과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이루면서 언제나 결합되어 있고, 그들의 새 생활을 통하여 우리도 하느님께 다가간다(교회헌장 49).
하지만 축복받은 그들의 행복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들은 마지막 부활, 즉 육신의 부활을 기다리고 인간의 한 부분인 육체가 영원한 삶의 기쁨에 참여하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뵙는 행복과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형언하기 어려운 행복을 누릴 뿐 아니라, 그들은 아직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형제와 자매들을 위하여 기도함으로써 교회 건설에 이바지한다(교회헌장 49). 


37장  하느님 나라가 오심


영원한 삶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고와 사랑과는 관련 없는 기쁨이나 행복이 아니다. 현세 생활에서 우리가 받은 모든 축복은 모든 것의 절정이고, 의미를 주며 완성을 가져오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는 인간의 활동은 중요하고 존엄한 것이다. 재능과 정성을 들여 사랑의 봉사를 실천하고 이 세상을 재건하려는 인간 노력은 하느님 나라의 성장에 이바지할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실 때에 그 나라는 완성될 것이다"(사목헌장 39). 

1. 세상의 변화: 종말
이 세상이 끝날 것이라고 함은 세상이 완전히 전멸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세상이 사라져 가며(1고린 7,31),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형될 것임을 뜻한다. 하느님 곁에 머무를 이들이 받을 최종 영광에 부적당한 것은 모두 소멸되고, 소중하고 좋은 것은 모두 만발할 것이다.
이렇게 물질세계 자체도 어떤 의미로는 파스카 축제에 참여할 것이다. 물질세계도 죽거나 소멸하여 풍족한 재생에 이를 것이다. "천체는 타서 녹아 버릴 것이고,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2베드 3,10). 그러나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베드 3,13).
사랑 위에 세워진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사랑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바칠 우리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는 누구나 주님과 함께 내세에 있을 즐거운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선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 이제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생명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묵시 21,4-6).
그때에는 우리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가 아니고 "얼굴을 맞대고"(2고린 13,12) 하느님을 뵈올 것이므로 우리는 아주 다른 존재일 것이다.
영원한 삶에 대한 열망은 현재생활을 포기하거나 우리의 임무를 소홀히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 열망은 현세는 시작에 불과하며 현세의 저변에는 앞으로 올 것이 자란다는 것을 인정함이다. 우리가 내세에 희망을 갖고 기대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이 완성되기를 원하며, 세상의 열망이 충족되고, 생명이 완성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
가톨릭 신앙은 언제나 신뢰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희망을 걸고 기대하여 왔다.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양식으로 당신 백성에게 오시나 가톨릭 신앙은 슬픔을 끝내고 사람들의 희망을 실현시킬 그리스도의 결정적 재림을 기다렸다. 그리스도 친히 당신은 주님이요 재판관으로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마태 16,27;26,64).
우리는 예수님이 언제 영광 속에 오실지 모른다. 재림의 그 시각은 하느님께서만 알고 계시나 그 시각은 생각지 않은 때에 올 것이다(2베드 3,10). 가톨릭 신앙은, 역사의 종말을 묘사하기 위하여 성서, 특히 묵시록에 나오는 상징적 표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자의적 해석은 계시를 곡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많은 이들이 묵시록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예언하였고,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선전에 현혹되어 커다란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 교회와 일부 개신교회는 마치 자신들이 종말에 대한 계시를 받은 양 선전하면서 자기 교회를 믿어 구원을 얻으라고 주장하였으나, 그들이 예견한 날에 종말이 오지 않았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성서와 교회생활에 충실한 이라면 이들의 허황된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들 종말론자들은 사회 생활을 등지고 개인의 구원 문제만을 강조함으로써, 하느님의 정의를 통한 세상의 구원을 선포하는 복음과는 거리가 있다 하겠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신부처럼, 하루하루를 마치 마지막날처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바르고 착하게 사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종말에 대한 자세라 할 것이다. 

3. 천년왕국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로 들어가시기 전에 지상의 나라를 천년 동안 성인들과 함께 통치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천년왕국설'은 신앙의 메시지와는 먼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사실 다가올 완성에 대한 갈망이다. 재림은 은총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활동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이미 실존하는 나라를 공포하는 것이기도 하다(요한 12,31).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현재 우리 안에 이미 있는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은 완성할 것이다. 재림 때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이 최대한으로 빛날 것이다. 그 부활의 힘은 그를 믿는 모든 무리에게 연장되어 그들을 죽음에서 부활시킬 것이다. 

4. 육신의 부활
"하느님의 나팔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다"(1데살 4,16). 구원된 이들이나 구원을 배척한(요한 5,29) 이들이나 모든 인간은 자기의 육체를 갖고 부활할 것이다. 심판날에 모든 사람은 육체를 갖고 하느님의 심판대에 나타나서 자신의 행동에 관한 보고를 드릴 것이라고 교회는 굳게 믿고 늘 가르쳐 왔다.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셨을 리가 없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고린 15,13-14). 부활 신앙이 바울로 사상의 핵심 중의 하나이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우리를 그분 곁에 앉히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고린 4,14).
그때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요한 11,25)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이 채워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창조자(요한 1,4)이시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시며, 그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0). 최후심판 때에 우리의 육체는 변할 것이다. 어떻게 변할 것인지는 확실히 모른다.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원형이다. 부활한 예수님의 육체는 그가 십자가 위에서 수난당하고 죽으실 때에 있던 바로 그 육체이다. "내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루가 24,39). 다른 점은 부활한 예수님의 육체는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었다"(1고린 15,45).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에로 부활할 모든 사람은 변할 것이다. 각 사람은 영혼과 육신을 가진, 전과 같은 사람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각자의 생명은 더 넓어지고 깊어질 것이다. 

5. 공심판(公審判
<요점정리> 
▨ 공심판이란 무엇인가?
공심판이란 육신이 부활한 후 예수께서 천사들과 모든 사람 앞에 각 사람의 사심판의 결과를 공포하시는 것을 말한다.
공심판은 각자가 죽은 후에 받은 사심판의 요약이 아닐 것이다. 이 최후심판에서 하느님은 당신 나라의 마지막 단계인 하늘의 공동체를 설립하실 것이다. 그때에 인간은 어떻게 사랑했느냐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다"(마태 25,35). 사람들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다. 그는 당신 사랑에 자유로이 응답하도록 누구나 생명에로 초대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큰 계명을 지키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심판하실 분은 하느님이시다. 모든 사람의 마지막 심판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구속 사업에서 맡은 각자의 역할에 합당한 양식으로 참여할 것이다. 사람의 최상 심판관이 되실 분은 사람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심판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구속자로서의 당신 사업을 완성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주님이란 것이 심판 때에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그분에게 굴복당할 때에는 아드님 자신도 당신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하느님께 굴복하실 것입니다"(1고린 15,28). 그 시각에 그리스도 안에 죽은 모든 사람이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환히 알게 될 것이다. 

6. 하늘나라
하늘나라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 양식이고, 하느님의 생명과 기쁨에 참여함이다.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나,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과 함께 누릴 영광스러운 생활을 장식하기 위해 육체를 가진 피조물에게 광채 가득한 곳을 제공하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교회는 하늘나라가 지상에서 일정한 거리에 떨어져 있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또한 하늘나라의 장소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다만 하늘나라는 하느님과 부활한 그리스도의 실재이며, 하느님의 백성과 그리스도가 함께 살며 누리는 기쁨이라고 가르친다.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이 생명의 완성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현세에서도 우리는 믿음, 희망, 사랑으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 현세에서 우리가 누리는 영원한 삶은 씨앗이고, 약속에 불과하다. 그때에는 우리가 하느님을 뵈올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없고, 하느님의 약속이 다 실현될 것이므로 바랄 것이 없고,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기쁨을 가지고 사랑할 것이다.
영원한 삶은 인간 상호간에 흐르는 깊은 사랑의 생활일 것이다. 우리는 위격적인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에 직접 참여하는 인격체로서 남아있을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뵙는 은총을 받아서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할 것이나, 하느님은 영원히 하느님이고 우리는 언제나 그의 피조물일 것이다. 영원한 삶에 들어가는 사람은 지복직관을 충분히 누릴 것이나, 기쁨의 핵심은 하느님을 소유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영원한 삶이란 하느님을 완벽하게 소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하느님을 믿음으로 보지 않고 "얼굴을 맞대고"(1고린 13,12) 뵈올 것이며,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에 살아 계심을 직접 파악하고 즐기므로, 참으로 행복하고 영원한 삶과 안식을 갖는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강하게 하여 주시고, 창조된 본 모습으로 변모시켜 주실 때에 우리는 자신을 성부, 성자, 성령에게 온전히 바치면서 삼위가 느낀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비로소 우리는, 순례자와 이방인의 신세를 면할 것이고(히브 11,13), 마음을 탁 놓을 수 있는 곳에 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가 마음 전체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영원한 삶에 도달할 때에 우리의 유배는(1베드 1,17) 끝날 것이다. 그곳이 바로 우리의 본고향이다. 거기에서 소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육체는 부활 때에 복구되고, 현세에서 거룩하고 소중하던 것이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에 보관될 것이다.
각자의 공로에 따라 하느님을 얼마나 똑똑히 보고 느끼는가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각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기쁨으로 충만되어서, 그런 차이가 알려져도 질투없이 누릴 것이다.